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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가까이 - 런던 메이페어 3 (조지 프레드릭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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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 '심장 가까이-런던 메이페어2 에서 이어짐)

조지 프레드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George Frideric Handel은 영어식 표기이고 그의 고향 독일식 표기는 Georg Friederich Handel이다. 그는 1685년 2월 23일 독일의 할레(Halle)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63세로 연로한 나이에 헨델을 낳았는데 ‘이발사 수술의(Barber-Surgeon)’라는, 오늘날 생각하면 상당히 생경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경멸했다고 한다. 그래서 피를 뽑고, 발치를 하고, 관장을 하거나 상처 부위를 꿰매는 등의 일을 머리를 깎는 이발사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붙여진 직업명이 ‘이발사 수술의’라고. 헨델의 아버지는 궁전에 고용돼 일할 정도로 실력파였다고 한다. 그는 7살(9살이라는 설도 있지만) 헨델을 데리고 바이센펠스(Weissenfels) 궁전 미사에 참석했다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로 헨델이 성당 오르간을 연주하게 됐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아들의 재능을 썩히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작곡자이자 할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인 프레드리히 자코우(Friedrich Wilhelm Zachow)를 헨델의 음악교사로 고용했다. 헨델의 재능을 알아차린 자코우는 어린 헨델에게 다소 혹독할 정도로 방대한 음악 스타일과 음악가를 소개하고 학습시키면서 바이올린과 오보에 같은 다양한 악기를 가르쳤다. 헨델의 나이 12살 때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이 사망했다. 그는 헨델이 음악가가 아니라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헨델이 다니던 중고등학교의 교장이 열정적인 음악인이라는 이유로 헨델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는가 하면 집안에 악기를 모조리 치워버릴 정도로 헨델이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 어린 헨델이 성당에 모인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 연주를 잘할 수도, 음악 선생님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헨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갔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함부르크로 갔다.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자로 오페라 관현악단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첫 오페라 알미라(Almira)를 만들어 작곡가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음악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다. 헨델은 함부르크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왕자 페르디난도의 초청을 받고 피렌체로 떠났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유명 작곡가와 친분을 쌓는 한편 로드리고(Rodrigo) 같은 히트곡들을 연달아 쏟아냈다. 이탈리아는 헨델에게 더없이 훌륭한 인큐베이터였다. 이제 세상은 조지 프레드릭 헨델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얻은 헨델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헨델의 영국 진출 무대가 되었던 Her Majesty’s Theatre

16세기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오페라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익숙한 형식의 공연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에서만큼은 18세기에 이르도록 낯선 형식으로 여겨지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헨델은 그런 시장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하노버 왕실로부터 악장직을 제안받는데 그 제안을 수락하면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런던을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1710년 런던을 여행한다. 한편 영국에서는 1705년 존 반버그(Sir John Vanbrugh) 경이 피카딜리 서커스가 가까운 헤이마켓(Haymarket) 거리에 퀸스 극장(Queen’s Theatre, 현재 Her Majesty’s Theatre)을 열었다. 퀸스 극장은 1710~1711년 시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즌은 1710년 11월 22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당시 공연 책임자는 아론 힐(Aaron Hill)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헨델이 런던을 방문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헨델에게 연락해 공연을 부탁했다. 헨델은 짧은 시간에 “나를 울게 내버려 두오(Lascia Chio Pianga)”라는 가사로 유명한 오페라 리날도(Rinaldo)를 선보여 흥행을 이끌었다. 그것을 계기로 런던 활동의 가능성을 확인한 헨델은 이탈리아로 복귀해 악장직을 내려놓고 짐을 싸서 런던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헨델은 <테세오(Teseo)>, <생일을 위한 찬가(Ode for the Queen’s Birthday)>, <유빌라테(Jubilate)> 같은 오페라를 발표했고 그의 공연에 크게 감동한 앤 여왕은 헨델에게 200파운드에 이르는 연봉을 하사했다. 영국 왕실의 환대와 흥행 성공에 고무된 헨델은 1726년, 영국 국민으로 귀화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시절에도 유행은 계속 변했다. 1740년 무렵이 되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연극 무대처럼 이야기에 맞는 배경을 설치하고 세속적인 가사를 노래에 실어 전달하는 오페라의 인기는 식어가고 특별한 배경, 의상, 연기 같은 요소를 배제하고 성서의 내용을 독창 혹은 합창하는 오라토리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토리오는 기도소(Oratory)라는 뜻으로 성가나 미사곡처럼 종교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헨델은 유행에 민감한 대중음악가였다. 그는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오라토리오의 걸작 메시아(Messiah)를 초연했다. 특히 메시아 2부의 할렐루야(Hallelujah)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장담하건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중에도 할렐루야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헨델은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연주가, 오페라 관현악 단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페라 극단을 운영하고 가수를 캐스팅하고 노래와 연기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했다. 그는 일생동안 약 50곡의 오페라와 30곡의 오라토리오, 120여 곡의 칸타타, 트리오 등을 만들었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였던데다가 실패도 많았고 따라서 수입에 굴곡도 심했다. 그래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하는 생계형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번아웃 상태로 빠져들었다. 시력도 급격히 나빠져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는데 그만 돌팔이 의사를 만나 1752년에는 완전 실명 상태가 됐다. 결국 1759년 코벤트 가든 정기 연주회에서 메시아를 공연 중 기절했다. 즉시 집으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오전 8시 영영 숨을 거두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는 남은 유산을 하인과 친구, 자선단체, 고아원에 기부했다. 

기타 연주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로 추앙받고 있는 지미 헨드릭스는 ‘굵고 짧게’ 인생을 살다 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노팅힐의 한 호텔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나이가 겨우 27세였다. 헨델은 74세에 25번지, 자신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지미 헨드릭스는 에릭 클랩튼이나 퀸의 브라이언 메이, 제프 벡을 모두 절망에 빠트릴 만큼 탁월한 연주실력을 보여준 기타리스트계의 지존이고, 헨델은 후배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만큼 미친 존재감을 보였던 클래식 음악의 거장이었다. 한 명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다른 한 명은 헤비메탈과 하드락계의 슈퍼스타로 시대를 풍미했다.

그 두 전설이 20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런던의 한 공간에서 만난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자신이 살던 공간에 헨델이 40년이나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처음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옥스퍼드 스트릿의 한 음반매장(HMV)에서 헨델의 메시아와 워터뮤직을 샀고 그의 연주에서 헨델의 멜로디가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오래전에 별이 된 두 천재는 우주 어디에선가 한 번쯤 마주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은 피아노를 치고 한 사람은 기타를 치면서 이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미 헨드릭스가 헨델을 만났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악수를 청했을 것이다.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쪽이 나의 심장과 가까우니. (Shake my left hand, man, it's closer to my heart.)”

양손잡이인 지미 헨드릭스는 살아생전 그렇게 말하며 왼손으로 악수를 청하곤 했단다. 나는 헨델이 만든 수많은 곡 중 사라방드(Sarabande)를 제일 좋아한다. 만약 내가 지미 헨드릭스의 인생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면 어느 한 장면에는 꼭 헨델의 사라방드를 넣을 것이다. 참고로 사라방드는 16세기 초 스페인에서 발생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행하던 댄스곡을 말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댄스곡은 포를라느, 프랑스 궁전에서 유행하던 3박자 댄스곡은 미뉴에트, 폴란드에서 생긴 행진곡풍의 댄스곡은 폴로네이즈라고 부른다. 그 밖에도 많은 춤곡이 있다. 가보트(gavotte), 루레(Loure), 샤콘느(chaconne) 등등. 사라방드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미친 스페인(La folie espagnole)’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곡인데 인터넷에서 찾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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