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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마을, 역사의 화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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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는 총 3부로 나누어 소개할 예정이다. 1부는 <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 2부는 
<마을, 역사의 화석이 되다>, 3부는 <저항의 도시, 루이스>이다.

 

(앞 글 '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에 이어)

2부 종교개혁과 토마스 페인 편

루이스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영국은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라는 게 국교다. 프로테스탄트 혹은 개신교라고도 한다. 성공회가 생기기 전에는 로마 가톨릭이 영국의 국교였다. 왕이 이혼하려면 로마에 있는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하던 시절, 악명 높은 헨리 8세가 권좌에 있었다.

헨리 8세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Cornelis Massys가 그린 헨리8세

당시 헨리 8세의 아내는 아라곤에서 온 공주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이기도 했다. 아라곤은 오늘날 스페인 피레네산맥에 있는 자치구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다. 카스티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 존재하다가 1715년에 사라진 왕국이다.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나라의 공주였던 캐서린은 헨리 8세가 맞은 6명의 부인 중 첫 번째 부인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헨리 8세의 형 아서 튜더와 결혼을 했는데 결혼 두 달여 만에 아서 튜더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미망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헨리 8세의 청혼을 받은 것이었다. 천상 왕의 아내가 될 여인이었나 보다. 캐서린은 키가 좀 작았을 뿐 꾀나 매력 있고 심성도 고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헨리 8세가 반할 만큼. 하지만 그것은 근친상간에 준하는 것으로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결혼이었다. 당연히 교황청의 반대에 부딪쳤다.

파올라 본템피 Paola Bontempi

 

 

 

 

헨리 8세는 교황청을 상대로 형과 캐서린은 결혼식만 했을 뿐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부부가 아니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그의 억지가 통해 둘은 부부가 됐다.

(사진: 2016년 BBC가 제작한 Six Wives with Lucy Worsley에서 캐서린 아라곤 역을 맡았던 파올라 본템피 Paola Bontempi)

 

 

 

 

 

 

어렵게 결혼한 만큼 잘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헨리 8세의 눈에 또 다른 여인, 앤 불린이 들어왔다.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로마 교황청이 걸림돌이었다. 명색이 왕인데 결혼도 이혼도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헨리 8세는 화가 났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다. 때가 좋았다. 마침 그 무렵 유럽 전역에 마르틴 루터가 주도하는 종교개혁 열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개혁을 통해 그들만의 종교, ‘성공회(Church of England)’라는 것을 만들었다. 1534년, 헨리 8세는 이제부터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통해 “모든 교회의 재산과 권리는 왕에게 귀속된다. 성직을 수여하고 박탈하는 것, 주교를 임명하는 것도 모두 왕의 권한이다”라고 못 박았다. 이제 가톨릭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당대 최고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였다. 소설 <유토피아>를 쓴 그 토마스 모어 말이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비서와 대법관으로 곁에 둘 만큼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측근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소신을 굽히지 않자 눈물을 머금고 처형시켜 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역사가 펼쳐졌다. 캐서린이 낳은 딸 메리 1세가 여왕이 되면서 아버지 헨리 8세가 펼쳤던 종교정책을 백지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 성공회가 죽을 차례였다. 그녀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국 성공회, 즉 개신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했다. 개신교 사제 2천 명이 교회에서 쫓겨났고. 공식적으로 288명의 신자가 화형 혹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처형은 1555년부터 1557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벌어졌는데 이때 루이스에서도 17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끌려와 화형에 처해졌다. 1555년 7월 22일 디릭 카버(Dirick Carver)라는 사람이 지금의 타운 홀(당시 올스타 여관) 앞에 설치된 화형대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는 손에 성경을 들고 무릎을 꿇어 기도를 했다. 집행관은 그에게서 성경책을 빼앗아 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도 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불 속에서 성경책을 찾아 군중에게 던지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자혜로운 주님이 나의 정신과 영혼을 기쁘게 거두어 주실 것이다.” 

그가 불 속에서 살린 성경책은 지금 루이스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556년 6월 6일에는 존 오스왈드, 니어 헨필드, 토마스 에빙턴 등 6명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하고 화형장으로 끌려 나와 디릭 커버의 뒤를 따랐다. 개신교 신자들은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 ‘사람’이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신앙의 주인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믿음은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도 설득되지 않았다. 그런 개신교 신자들을 본 런던 주교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화형식을 계획하고 루이스 타운 홀 앞에 초대형 화형대를 준비했다. 1557년 6월 22일, 목수, 농부, 주부 등 개신교 신자 10명이 뜨거운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가이 폭스 (Guy Fawkes)

가이폭스
Photo by NEOSiAM 2021. 가이 폭스 마스크는 오늘날 저항과 자유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1605년 런던에서 ‘국회의사당 폭파음모사건’이 터졌다. 이유는 메리 1세 사후 엘리자베스 1세를 거쳐 제임스 1세에 이르면서 국교가 또다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임스 1세는 제임스 6세라는 이름으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유일한 혈족으로서 잉글랜드의 왕까지 떠맡게 된 인물이다. 둘은 촌수로 따지면 6촌으로 할머니와 손자 사이였다. 그러니까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까지 통치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임스 1세로 바꾼 것이다. 그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여러 권의 성서를 편찬할 만큼 종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그는 선조들처럼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방법으로 자신의 종교관을 강요했다. 청교도들이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도 그 시기다. 가톨릭 신자였던 귀족 로버트 캐츠비는 그런 왕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할 계획으로 똑똑하고 믿을 만한 인물을 고용했다. 그가 바로 가이 폭스였다. 가이 폭스는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지하에 폭탄을 설치한 후 의회가 열리는 날 폭파해 국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한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가이 폭스를 포함해 음모에 가담했던 7명은 모두 처형됐다. 예의 그 잔인한 방법으로. 오늘날 남자를 의미하는 ‘가이(GUY)’라는 단어가 바로 그때 그 남자, 가이 폭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루이스는 매년 11월 5일 17명의 순교자와 가이 폭스 음모사건을 기념하는 불꽃축제를 연다. 17개의 불타는 십자가와 수백 개의 횃불, 정치인을 풍자한 인형들 그리고 죄수와 해적, 시민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도심 한복판을 행진한다. 수십 명이 불통을 끌고 질주하기도 하고 캠프파이어를 하듯 거대한 조형물을 불태우기도 한다. 대략 5천 명이 행사에 참여하고 루이스 인구의 4배가 넘는 8만 명이 구경을 한다. 루이스 불꽃축제는 영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불꽃행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이스를 ‘불꽃축제의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인생에 새긴 남자

토마스 페인&#44; 상식
토마스 페인과 그의 역작 '상식'

루이스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이 있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다. 그는 <상식>, <인간의 권리>, <이성의 시대> 같은 책을 써서 ‘미국 독립’과 ‘프랑스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걸출한 인물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문제적 인물’이라는 수사가 부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는 1737년 뎃포드(Thetford)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이면서 여성용 속옷의 일종인 코르셋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3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일을 배워 켄트(Kent)의 샌드위치(Sandwich)에서 코르셋 장인으로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토마스는 샌드위치에서 그 지역 여인 메리 람버트(Mary Lambert)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곧바로 임신을 했다. 그런데 부부의 생업인 속옷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가게 문을 닫고 북쪽으로 15km 떨어진 또 다른 바닷가 마을, 마게이트(Margate)로 이사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끔찍한 불행을 맞았다. 조산으로 아내와 아기가 모두 사망한 것이다. 졸지에 외톨이가 된 토마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비정규직 공무원이 되었다. 낙향 1년 후인 1762년에는 세무 공무원이 되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물품을 검사하지도 않고 검사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그는 즉시 부당해고라며 복직신청을 했고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생계를 위해 코르셋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1768년, 마침내 세무 공무원으로 복직해 루이스로 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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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포토/ 토마스 페인이 살았던 불 하우스

그는 15세기 건물, 불 하우스(Bull House)의 두 층을 빌려 2층은 숙소로 1층은 담배가게로 꾸며 ‘부업하는 세무 공무원’으로 의욕적인 새 삶을 시작했다. 당시 세무 공무원의 월급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부업은 필수였다. 루이스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헨리 3세와 전쟁을 치렀던 곳으로 군주제에 대한 반감이 높고 공화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 마을이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토마스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루이스의 자치정부 코트 릿(Court Leet)의 멤버가 되어 마을 회계를 책임졌다. 그리고 교회 운영위원으로 세금과 십일조를 징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업무에도 관여했다. 새로운 인연도 만났다. 그는 그가 살던 건물주의 딸 엘리자베스 올리브(Elizabeth Ollive)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주고 떠난 식료품 가게도 운영했다. 그렇게 토마스는 부지런히 새로운 희망을 일구고 있었다. 아마 그때까지 토마스는 몰랐을 것이다. 희망은 불행도 등에 업고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는 1772년에 생애 첫 번째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은 그가 속한 세무 공무원 집단의 근무환경과 임금 개선을 촉구하는 일종의 제안서(The Case of the Officers of Excise)였다. 그 제안서 안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세무비리를 폭로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는 4천 부를 찍어 국회의원들과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2년 후 무단결근을 빌미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곧이어 그가 운영하던 담배가게도 망하고 부인과도 이혼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불행이 폭풍처럼 밀려와 겨우 쌓은 행복을 쓸어 가 버렸다. 그는 루이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새로운 운명과 마주했다. 

토마스 페인은 친하게 지내던 상사의 주선으로 벤자민 플랭클린을 만났다. 피뢰침과 다초점 렌즈를 발명한 그 벤자민 플랭클린이 맞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며 100달러짜리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사업과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영국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벤자민의 아버지가 영국 출신인 데다가 당시만 해도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벤자민은 토마스 페인에게 추천서를 써 주며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권했다. 가족도, 직장도, 재산도 없는 토마스에게 그 정도는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1774년 11월 30일, 37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토마스 페인은 펜실베이니아로부터 시민권을 받고 펜실베이니아 매거진 (Pennsylvania Magazine)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유능한 언론인이었던 그는 2년 후 미국을 뒤집어 놓은 47페이지짜리 문제작 <상식(Common Sense)>을 발표한다. <상식>은 원래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여러 신문에 편지 형식으로 연재하던 글이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면서 소책자로 엮은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300만 명 정도였다. 문맹률이 높은 시대였다. 그런데 <상식>의 판매량이 10만 부가 넘었다. 거기에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진 낭독과 책을 빌려가며 돌려 읽은 회독률까지 고려하면 글자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식>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팔린 것까지 합하면 약 50만 부에 이른다고 한다. 오해는 마시라. 그는 그렇게 책을 팔았지만 변변한 수입을 얻지는 못했다. 책을 익명으로 낸 데다가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판매수익을 꼼꼼히 챙기지 않은 탓이었다. <상식>은 정치,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주군인 왕을 거부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는 게 옳은 행동인지, 자신들이 영국 군대를 이길 만큼 힘이 있는 것인지, 독립을 하면 잘 살 수는 있을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식민지 미국 국민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상식>의 내용은 사실 간단했다.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려는 프랑스를 몰아내고 원주민과 싸워가며 피를 흘리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낯설고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죽을 고생도 하고 있다. 영국 왕의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국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왕은 그런 우리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군대까지 보내 위협하며 더 많은 세금을 보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상식적이지 않다.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뒷 글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짐)

1&#44; 2차 세계대전 참전장병 추모비
1, 2차 세계대전 참전장병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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