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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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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는 총 3부로 나누어 소개할 예정이다.
1부는 <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 2부는 <마을, 역사의 화석이 되다>, 3부는 <저항의 도시> 이다.

1부 몽포트 편

“어디가 제일 좋아요?” 
영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자주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다. 유명 관광지 위주로 몇 곳을 소개한다. 성의 없는 줄 알지만, 묻는 이의 취향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최선의 대답이다. ‘유명’이라는 단어에 ‘객관성과 보편적 취향’의 최대치가 담보되어 있다고 믿으므로.

그런데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따로 있다. 영국 남부, 바다가 가까운 곳에 루이스(Lewes)라는 마을이 있다. 언제 생긴 마을인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고고학자들도 “아마 인류의 탄생과 나이가 같을 겁니다” 정도로만 말하는 곳이다. 그냥 보기엔 적당한 크기에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인구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행정적으로는 도시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루이스를 걸어보면 마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작고 오래된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마을. 예쁜 카페들도 많아서 차 한 잔 시켜놓고 엽서를 쓰거나 책을 읽기에도 좋은 그런 마을이다.

루이스에는 1858년에 문을 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관도, 무명화가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겸 갤러리도, 18세기부터 대를 이어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맥주공장도 있다. 한눈에 주변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성과, 꽃향기 가득한 마을 정원, 정원은 ‘아기자기’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만큼 냇물과 화단과 싱싱한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돌멩이가 깔린 골목들과 중세시대 건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개성이 철철 넘치는 마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은근히 끌리는 게 있는 마을이다. ‘은근히’라고 표현하지만, 그 끌림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강렬함이 있다.

한때, 루이스는 전쟁터였다. 1264년, 헨리 3세와 지방 군주 몽포트(Simon de Monfort)가 루이스에서 맞붙었다. 사실 몽포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헨리 3세의 막내 여동생과 결혼한, 그러니까 왕의 매부였다. 그런 둘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게 된 것은 둘의 정치적 성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헨리 3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독재자였고 몽포트는 신념이 강한 민주주의자였다. 헨리 3세는 과시욕이 넘치고 사람을 편애하는 데다가 정치적으로도 무능한, 그래서 인기가 바닥인 왕이었다.

사이먼 드 몽포트

몽포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편에서 그를 충실하게 보좌했고 왕도 그를 신뢰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한계가 분명했다. 왕은 구제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고 몽포트는 결국 왕에 대한 충성심을 거두었다. 루이스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역사의 몇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의 시계를 살짝 뒤로 돌려보겠다. 누구나 한 번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라는 것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좀 더 구체적으로는 6월 15일에 지방 영주(바론, Baron)들이 헨리 3세의 아버지 존 왕(King John)을 압박해서 체결한 합의서다. 존 왕이 잘 하지도 못하는 전쟁을 구실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겠다며) 어처구니없이 많은 세금을 거두고 멀쩡히 주인이 있는 땅을 빼앗는 등 갖은 폭정을 펼치자 참다못한 영주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영주들은 왕의 군대를 압도하는 군사력으로 존 왕의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자제하고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받는 선에서 멈춘다. 마그나 카르타에는 세금이나 땅을 줄이거나 포기하도록 강제해 왕의 재산을 제한하기 위한 조항이 많았다. 왕과 영주들이 다투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니 당연했다. 당연하지만 그런 조항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높은 평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21세기 사람들이 13세기 마그나 카르타에 감동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무도 사람의 신체적 자유를 구속하거나 해칠 수 없고,
사유재산을 빼앗을 수도 없으며 모든 죄는 사법절차에 따라 물어야 한다.’

갈등의 시작

문제는 합의서에 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영주의 다툼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이듬해 사망했고 9살짜리 아들 헨리 3세가 왕좌에 올랐다. 그런데 헨리 3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마그나 카르타를 무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궁리만 했다. 영국은 각지의 귀족들을 궁전으로 불러 토론을 벌이고 중요한 결정을 하는 ‘총회(Great Court)’라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마그나 카르타가 만들어진 후에는 평민들도 초대됐다. 그런데 왕 헨리 3세는 점점 자신이 필요할 때만 총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필요할 때란 돈이 필요할 때였다. 왕은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거나 기존의 세금을 인상하고 싶을 때만 회의를 열어 의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왕이 올리려는 세금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금 이외에도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들은 왕이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왕권을 더 강력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었다. 1258년 봄, 헨리 3세가 옥스퍼드에서 미친 의회(Mad Parlilement)라는 이름으로 의회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 몽포트가 영주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내밀었다. 위세에 눌린 헨리 3세는 조례에 서명했다. 위세에 눌린 것이 아니고 그까짓 거 사인해주고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옥스퍼드 조례는 마그나 카르타보다 훨씬 강력한 개정판 합의서였다. 의회를 1년에 3번 열도록 강제했다. 더 이상 왕 마음대로가 아니었다. 그리고 돈 문제보다는 다양한 현안에 집중하도록 했다. 왕과 영주, 양측에서 추천한 15인 회의(Council)가 정부를 구성해 왕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전체 행정부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는 한편 그들 15명은 12인 영주들의 감시를 받도록 했다. 몽포트는 정부 인사 15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3세의 안하무인식 독재는 계속됐다. 역시나 그에게 합의서는 아무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였던 것이다. 그는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았고 세금 인상도 마음대로 강행했다.

왕에 맞선 한판 대결, 루이스 전투

몽포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헨리 3세도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친위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루이스에서 마주쳤다. 1264년, 꽃들이 아우성치는 5월이었다. 먼저 도착한 헨리 3세는 루이스 성을 등진 언덕에 자리를 잡고 보병을 배치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도 참전했다.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루이스 성으로 들어갔다. 몽포트는 부대를 4개로 나누어 루이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프함 언덕(Offham Hill)에 자리를 잡았다. 양측의 병력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1만 명대 5천 명 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헨리 3세 쪽 병사가 몽포트의 병사보다 2배나 많았다. 14일 새벽, 몽포트의 병사들이 헨리 3세의 선발대 무리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자 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가 뛰쳐나와 몽포트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에드워드의 공격에 대열 맨 좌측에 있던 런던 시민군이 무너졌다.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런던 시민군은 에드워드 기병대의 기세에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25살 에드워드는 모든 것이 충만했다. 충만하다 못해 넘쳤다. 의욕도, 혈기도 그 리고 용기도. 런던 시민군은 미친 듯이 도망쳤고 에드워드는 미친 듯이 쫓아갔다. 미친 듯이 쫓아오니 미친 듯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미친 듯이 도망치니 미친 듯이 쫓아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양쪽 다 너무 멀리 갔다. 에드워드의 기병대는 전장에서 무려 6.5km나 벗어나 있었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 헨리 3세는 이미 몽포트의 포로가 돼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사라지자 남겨진 헨리 3세의 병사들은 이때다 하고 달려드는 몽포트 군대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지리멸렬하다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수적으로 2배나 우세했지만 아들의 돌출행동으로 전투에 지고 포로가 된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잘 지키겠다는 내용이 담긴 루이스 협약(Mise of Lewes)에 서명을 했고 아들 에드워드 왕자는 몽포트의 포로가 됐다.

백일천하로 끝난 몽포트의 꿈

몽포트는 옥스퍼드 조례에 따라 15인의 의원으로 구성된 정부를 수립하고 개혁과 관련된 모든 현안을 몽포트 의회(Montfort’s Parliament)와 협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몽포트 의회는 영국 전역의 주(우리나라의 도에 해당)와 마을에서 파견된 기사와 평민으로 이루어져 그 숫자가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회의장은 늘 대만원을 이뤘다. 각 주에서 기사 2명씩 그리고 각 마을에서 평민 2명씩이 대표로 초대를 받았는데 국가가 모든 경비를 지급했다. 헨리 3세는 실권 없는 왕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몽포트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루이스 전투에서 승리한 지 2년이 채 안 된 1265년 3월, 에드워드 왕자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후, 오늘날의 보호관찰처럼 관리의 감시를 받았지만 5월 28일 관리를 따돌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정을 지지하는 영주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그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몽포트가 다시 전쟁터로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는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웨일즈가 가까운 이샴(Evesham)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다. 그는 아본 강가(River Avon)에 텐트를 쳤다. 다음날 아들의 군대와 합류해 에드워드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8월 4일, 아침부터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렸다. 몽포트의 눈에 족히 만 명은 될 것 같은 큰 군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몽포트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포트를 기만 혹은 조롱하기 위해 몽포트의 깃발을 들고 행군하는 에드워드의 군대였다. 한 부하가 이틀 전에 아들 영거(Simon de Montfort the Younger)가 에드워드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늘에는 무거운 먹구름이 가득하고 이샴 들판은 쏟아지는 비로 흠뻑 젖었다. 몽포트는 혼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죽을 때가 됐군.” 

몽포트의 최후

아들의 사망 소식에 이성을 잃은 그는 병사들과 함께 에드워드군의 중앙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것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행위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군사를 거느린 에드워드는 손쉽게 몽포트군을 포위했다. 양측의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동안 에드워드는 12명으로 이루어진 별도의 특공대를 투입해 몽포트를 집중공격하도록 했다. 그것은 절대로 몽포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그래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비는 계속 내려 몽포트의 시야를 흐리고 갑옷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특공대는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어 몽포트를 공격했다. 마침내 특공대 중 한 명인 로저 모티머가(Roger Mortimer)가 몽포트의 목에 창을 꽂았다. 몽포트는 이렇게 말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에드워드는 이미 승기가 굳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몽포트의 병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날 이샴 들판은 생지옥, 그 자체였다. 에드워드는 몽포트의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했다. 에드워드는 남은 시신을 잘게 토막 내 몽포트의 적들에게 보냈다.

Unknown author. British Library Cotton MS Nero D ii, f. 177 (date: late 13th century). 훼손된 몽포트의 시신을 표현한 그림

그것은 몽포트를 모욕하기 위한 행위였으며 루이스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광란의 복수극이었다. 나폴레옹은 사이먼 드 몽포트를 가장 위대한 영국인 중 한 명이라며 칭송했고 오늘날의 영국인들은 그를 의회의 아버지(Father of the House of Commons)라고 부른다. 물론 냉정한 평가도 있다.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반대 세력은 잔인하게 괴롭히고 자기편에게는 온갖 특혜를 베푸는 정의롭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식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면서 외지로 추방하고 심지어 수백 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유대인에게 진 빚은 값지 않아도 된다며 탕감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그를 포퓰리스트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그 모든 비난에도 불구하고 몽포트로 인해 영국에 민주주의가 한걸음쯤 빨리 찾아왔음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루이스_성
루이스 성
루이스 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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