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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저항의 도시,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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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는 총 3부로 나누어 소개할 예정이다. 1부는 <영국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 2부는 
<마을, 역사의 화석이 되다>, 3부는 <저항의 도시, 루이스>이다.

 

(앞 글 '마을, 역사의 화석이 되다'에 이어)

혁명이 있는 곳에 그가 있었다

토마스 페인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떤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지 일깨우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봉건제도를 비판했다. 미국이 독립했을 때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토마스 페인은 미국뿐 아니라 13개 식민지 국민에게 똑같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라”라고 외쳤다. 토마스 페인은 혁명군(독립군)으로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종군 중에도 그는 <위기>라는 책을 써서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며 전쟁을 독려했다. <위기>는 예비역들이 재입대를 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776년, 마침내 미국은 독립했고 토마스 페인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787년 토마스 페인은 고향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인간의 권리

그가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프랑스에서는 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책 <인간의 권리>를 썼다. <인간의 권리>는 영국 당국의 위협으로 출판사가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늦게 출판이 됐는데 순식간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인간의 권리>는 독립한 미국과 혁명 중에 있는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반면 영국의 왕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토마스는 <인간의 권리>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집필하고 발행했다. 1부는 1791년 3월 프랑스에서, 2부는 이듬해 2월 런던에서 완성했다. 2부를 쓴 후 그는 곧바로 프랑스로 피신했다. 영국 정부가 반란을 선동한 죄로 그를 체포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명예시민증(1792년 8월)을 선물하는 한편 불어를 못 하는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통역까지 붙여가며 프랑스 헌법을 제정하는 국민회의 의원으로 추대했다.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그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 없이 열린 궐석재판이었다. <인간의 권리>는 출판이 금지되고 출판사 사장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은 영국의 왕을 모욕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책에 대해 영국이 불편해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왕권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영국에 대놓고 “영국은 성문화된 헌법을 만들어 민주주의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귀족이 세습되지 않도록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에 누진세를 적용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을 인하해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에 머물렀다. 토마스 페인의 시련은 진작에 바닥을 쳤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하를 파고들었다. 그는 혁명세력이 그들의 왕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루이 16세를 처형하면 영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미국도 독립전쟁 때 루이 16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프랑스에 이익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랑스가 봉건제와 함께 사형제도도 폐지하는 최초의 국가가 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급진 혁명세력의 반감만 불렀다.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토마스 페인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견이 같으면 친구고 다르면 순식간에 적이 되는 야만적인 세상은 프랑스나 영국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보다. 토마스 페인은 세상을 향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파리의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는 1년여 기간 동안에도 할 말은 다 하고 죽어야겠다는 듯, 격정적으로 글을 쏟아냈다.

이성의 시대 Age of Reason
왼쪽은 런던에서 오른쪽은 시카고에서 출판한 <이성의 시대>

이번에는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였다. 그는 성경은 사람이 쓴 문학 서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목격한 교회의 부패를 강조해 기술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교리로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조종한다. 인간사에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없다. 오로지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데이즘(Deism)’적 사고를 설파했다. <이성의 시대>는 그에게 무덤이 되었다. 그는 무신론자로 낙인찍혔고 죽을 때까지 외로워졌으며 가난해졌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영국 정부는 <이성의 시대>가 혁명을 부추긴다며 출판 관련자들과 배포자를 모두 기소했다. 프랑스의 반응은 차가웠다.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작가 토마스 페인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1802년, 그는 미국의 외교적 도움으로 프랑스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갔다. 미국 시민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향 영국으로 가면 처형을 면할 수 없는 처지이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평생 쫓기고 투옥되는 고난을 반복하며 “혁명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낸 그는 1809년 6월 8일 아침,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그로브가 59번지(59 Grove Street in Greenwich Village)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토마스 페인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의사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회개를 유도하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소.” 그런데 조문객이 몇 명이었냐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겨우 6명이었고 그중 2명은 토마스 페인이 펼쳤던 흑인 해방 운동으로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조문객 없이 혼자 조용히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이든 그가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은 같다. 미국의 신문들은 그의 부고를 이렇게 전했다. “그는 오래 살았고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을 저질렀다.” 토마스 페인의 아버지는 퀘이커였고 어머니는 성공회 신자였다.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을 뉴 로첼(New Rochelle)에 있는 퀘이커(Quaker) 마당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퀘이커 공동체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가 살았던 집 호두나무 아래에 묻혔다. 그가 살았던 집과 무덤은 뉴욕의 뉴로첼에 박물관(Thomas Paine Cottage Museum)으로 남아있다.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불행

토마스 페인의 수난은 죽어서도 계속됐다. 1819년, 저널리스트 윌리엄 코벳(William Cobbett)이 한밤중에 토마스 페인의 무덤을 파헤쳐 뼈를 발굴한 뒤 영국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는 토마스처럼 미국에서 활동하던 영국 언론인이었다. 그는 한때 악랄하다고 할 정도로 과격하게 토마스 페인을 비난하는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의 보수당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 보수당의 민낯을 본 후 변했다. 토마스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된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토마스 페인을 고향으로 데려가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줄 결심을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토마스를 묻을 장소와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엽기적이라며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토마스의 시신은 코벳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집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집이 팔리면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판매를 맡은 부동산이 사람 시신이 있는 집을 팔 수는 없었을 테니 처리를 했을 텐데 어떻게 처리를 했는지 알려지지 않아 행방불명 상태로 남게 된 것이다. 윌리엄 코벳의 아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루이스에는 비록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살던 중세시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루이스는 이렇게 혁명의 기운이 높고 왕정에 반대하는 성격이 강한 마을이었다. 이 작은 마을이 자꾸 끌리는 이유는 그런 고난과 저항의 역사가 배어 있고, 그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후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헌책방
15세기 건물에 자리한 헌책방. 이 헌책방은 1936년에 생겼다
헌책방 간판

루이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사고가 참 독립적이고,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들은 20년 전 수입농산물을 지양하고 지역농산물을 소비하자며 직거래장터(Farmer's Market)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마을에서만 통용이 되는 자체화폐 ‘루이스 파운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지역 내 생산과 소비를 강화해서 ‘경제적 독립’을 확보하자는 시도였다. 지역 자체 주식도 발행해서 지역의 공공사업에 투자하고 그 이익을 지역민이 나누는 사업도 하고 있다. 루이스 파운드의 화폐 전면엔 영국 여왕의 얼굴이 아닌 토마스 페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돈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힘이 있다.’

토마스 페인의 어록을 몇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다른 나라의 실수로부터 지혜를 배우자.", "의혹은 비열한 영혼의 동반자이자 모든 선한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한 번 깨우친 마음은 다시 어두워질 수 없다.", "지금은 사람들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입니다." 

루이스에는 헨리 8세가 네 번째 부인이었던 앤(Anne of Cleves)에게 주었다는 집도 있고,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등장하는 비운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살던 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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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포토/ 1) 버지니아 울프가 살었던 집. 방문 가능한 시간을 확인하고 가는것이 좋다 2) 지역경제를 살리고 탄소발자국을 줄이기위해 지역 농산물을 애용하는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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