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 '은밀한 임무-블레츨리 파크 1'에서 이어짐>
블레츨리 파크가 가져온 문명의 발전
1939년, 앨런 튜링과 고든 웰치맨(Gordon Welchman) 그리고 여러 동료 팀원들이 영국형 봄(British Bombe)의 초기 모델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폴란드가 개발한 봄에서 크게 발전한 코드 브레이커(Code Breaker)였다.
이어 1940년 3월 암호명 빅토리(Victory)라는 이름의 봄이 가동에 들어갔고 8월에 고든 웰치맨의 디자인을 채택한 두 번째 모델 아그네스(Agnes, 줄여서 Aggie)가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한 해 동안 영국형 봄은 178개의 암호를 해독해 냈다. 1942년까지 영국형 봄은 약 200대가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폭격에 대비해 블레츨리 파크 밖 여러 지역에 분산 설치됐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돌며 암호를 풀어냈다. 그 양이 하루 평균 3천 개에 달했다고 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등장하는 기계가 바로 이 영국형 봄이다.
에니그마라고 하는 산은 넘었지만 로렌즈라고 하는 더 높은 산이 남아있었다. 로렌즈 암호 해독기의 개발을 서둘러야 했다. 앨런 튜링은 토미 플라워(Tommy Flowers)에게 도움을 청했다. 토미 플라워(이름이 좀 특이하다. 꽃이라니)는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야간대학을 마치고 우체국 전산연구소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였다. 케임브리지를 나와 미국 유학까지 한 앨런 튜링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 역시 걸출한 인물이었다. 1943년 토미 플라워와 수학자 맥스 뉴먼(Max Newman), 히스 로빈슨(Heath Robinson) 등은 우체국 전산연구소에서 최초의 디지털 전자 컴퓨터인 ‘콜로서스 마크 1’을 탄생시켰다. ‘콜로서스 마크 1’은 블레츨리 파크로 옮겨졌고 곧이어 속도가 훨씬 빨라진 ‘콜로서스 마크 2’가 탄생했다. 이후 매달 1대씩 총 10대의 ‘콜로서스 마크 2’가 만들어졌다. 협업을 통해 뭔가 큰 성취를 이뤘을 때 누구의 공이 제일 컸느냐를 두고 다투는 일은 흔하다. 토미 플라워는 훗날 잭 코플랜드(B. Jack Copeland)와의 인터뷰에서 콜로서스는 자신의 작품이고 거기에 앨런 튜링의 역할은 없었다고 했다. 콜로서스 개발에 함께한 팀원들의 공로를 인정하더라도 토미 플라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여러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에니그마에 이어 로렌즈까지 난공불락의 암호가 모두 깨지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이동과 작전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을 D-Day로 정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로 상륙할 것처럼 기만전술을 펼쳤다. 블레츨리 파크는 히틀러가 칼레 상륙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암호를 입수했다. 암호를 가로채 해독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기만전술이 적에게 어떻게 먹히고 있는지까지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독일군이 상륙작전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도 파악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연합군은 독일군의 전화선과 통신망을 파괴해 무선을 쓸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 자연히 블레츨리 파크에서 해독해야 하는 암호의 양이 엄청나게 폭증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하던 550명이 해독한 독일군 최고급 비밀정보는 글자 수로 6천3백만 자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발전시키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최초의 디지털 전자 컴퓨터가 탄생했으니 말이다. 사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사용하기에 조심스러운 단어다. 동시에 집착하면 안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 수 없다. 따라서 ‘최초’라고 알려진 것들이 정말 최초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실제로 최초라고 믿었던 것들이 최초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일은 빈번하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컴퓨터라고 정의할 것인지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주판이나 파스칼의 계산기를 컴퓨터의 조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블레츨리 파크에 있는 콜로서스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조심스러운 이유는 그 무렵 독일이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원리로 비슷한 기능을 하는 컴퓨터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알려진 에니악과의 비교다. 에니악은 1946년도에 만들어졌고 콜로서스는 1943년에 탄생했다. 그런데도 에니악이 최초의 컴퓨터로 불리는 이유는 콜로서스가 블레츨리 파크와 함께 소위 울트라 시크릿(Ultra Secret)으로 봉인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윈스턴 처칠은 블레츨리 파크의 모든 기록을 비밀에 부치고 컴퓨터는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가운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에니악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최초의 컴퓨터로 등극했다.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앨런 튜링과 토미 플라워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특히 토미 플라워는 콜로서스를 만들면서 자기 돈까지 쏟아붓는 바람에 빚까지 지고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정부가 1,000파운드를 보전해 주기는 했지만 충분한 보상은 되지 못했고 그마저도 그는 함께 수고한 동료들과 나눴다. 이쯤 되면 콜로서스를 비운의 컴퓨터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보안과 관련해 토미 플라워에게는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콜로서스와 같은 컴퓨터를 다시 한번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은행을 찾아가 대출을 신청했다. 하지만 은행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컴퓨터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국가기밀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출은 거부됐다.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한 사람들은 한 번쯤 비슷한 불편을 겪었으리라. 블레츨리 파크가 봉인을 풀고 세상 밖으로 나온 때는 1974년이었다. 그 무렵 전시기밀이 해제됐고 정보부 소속 고위장교였던 윈터보담(F. W. Winterbotham)이 블레츨리 파크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특급비밀 The Ultra Secret>을 출간했다.
1991년, 컴퓨터 공학자 토니 세일(Tony Sale)과 그의 팀이 콜로서스 복원 계획을 세웠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진행은 더뎠다. 토니 세일은 엔지니어들이 보안법을 어겨가면서 숨겨뒀던 사진과 미국 안보국이 국립문서보관소로 옮겨놓은 자료를 입수해 퍼즐을 맞추듯 복원을 진행했다. 1998년, 92세가 된 토미 플라워는 복원된 콜로서스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콜로서스는 2007년에 이르러서야 복원이 됐고 그로부터 4년 후 토니 세일도 세상을 떠났다. 2009년쯤 블레츨리를 방문했을 때 한 노인을 보았다. 그는 복원된 콜로서스 앞에서 자신이 복원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는 말에 휴대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노인도 함께 찍혔다. 그가 토니 세일이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좀 더 잘 찍어 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복구할 수 없는 순간을 무심코 지나칠 때가 있다. 복원된 콜로서스와 영국형 봄은 블레츨리 파크에 설치됐다가 2018년 블레츨리 파크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국립 컴퓨터 박물관(The National Museum of Computing)으로 옮겨 전시돼 있다. 블레츨리 파크는 한때 사라질 위기를 맞았지만 지역 정부의 노력으로 살아남았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도 언급하듯이 역사학자들은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한 두뇌들의 헌신으로 종전을 최소 2년 앞당길 수 있었고 그 결과로 1400만 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켈베돈 벙커(Kelvedon Bunker)
켈베돈 벙커를 찾아가는 데는 주의력이 필요하다. ‘비밀 핵벙커(Vast Ex-Government Secret Nuclear Bunker)’라는 녹색 표시가 있기는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놓치기 쉽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싶으면 속도를 줄이고 표지판을 지나치지 않도록 길가를 잘 살펴야 한다. 표지판이 보이면 곧장 핸들을 180도쯤 꺾어 먼지 날리는 비포장길로 들어서야 한다. 들판을 달리고 있다고 느껴지면 맞게 가고 있는 것이다. 우회전을 두어 번 하다 보면 오른편으로 숲이 보일 것이다. 좌 들판 우 숲을 끼고 직진해서 들어가면 된다. 공터가 나타나면 거기가 주차장이다. 이제 차는 주차장에 세워놓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100m쯤 걷다가 약간 내리막길이 나오면 오른쪽을 살펴보자. 나무에 둘러싸인 집이 보일 것이다. 넓은 콘크리트 마당을 가진 2층 벽돌집이다.
런던에서 동쪽으로 53km 떨어진 이 집에는 농사꾼 패리쉬(J.A Parrish) 가족이 살고 있었다. 1952년 어느 날, 그 집에 정부 관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농장 땅 3만 평을 사겠다고 했다. 사실상 강제 매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세계는 심각한 냉전 상태였고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만약 영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는다면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전쟁을 지휘할 시설이 필요했다. 처칠 정부는 그 시설을 건설할 장소로 파리쉬 가족의 농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외관은 평범한 농장 집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면 방이 아니다. 91m에 이르는 긴 지하터널이다. 그 터널을 지나면 1.5톤짜리 철문이 막고 있는데 그 문을 열면 지하세계가 펼쳐진다. 그 지하세계에는 600명이 3개월 동안 먹고, 자고, 씻고, 치료하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일단 풀로 덮인 지표면 바로 아래에는 11만L짜리 물탱크가 숨어있다. 그리고 그 아래, 지하 8m 지점부터 35m 아래까지 3층 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땅 위에서 보면 그 밑에 3층짜리 건물이 들어가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잡초 무성한 들판이다. 이 지하 건물은 총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가장 안쪽 벽은 30m 두께의 콘크리트다.
가장 위층에는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와 식량 창고, 실내온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 주는 냉각 시스템이 있다. 중간층에는 총리실과 정부 각료들이 사용하는 방 그리고 국방부, 건설교통부, 보건부 같은 정부 부처들의 사무공간이 있다. 바깥 상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상황실과 브리핑룸,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통제실 그리고 수술 장비를 갖춘 병원도 있다. 이 지하세계에는 방사능 측정기와 방독면 그리고 핵폭탄이 어디서 어떤 강도로 터졌는지 방사능이 바람을 타고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분석할 수 있는 카메라와 AWDRE(Atomic Weapons Detection Recognition and Estimation)라는 모니터 장비도 구비돼 있다. 다른 유럽 국가를 포함해 지상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통신시설은 가장 아래층에 있다. 공기와 물을 정화해서 지하세계로 공급하는 시설도 가장 아래층, 별도의 공간에 위치해 있다. 탈출구는 또 다른 터널을 통해 들판과 숲길이 만나는 방향으로 이어져 있고 출구는 외부에서 알 수 없도록 잡초와 나무로 덮여있다.
영국엔 켈베돈 벙커와 같은 시설이 11개 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옮겨 다니면서 전쟁을 지휘하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안다고 하면 안 되는 국가기밀이니까. 켈베돈 벙커는 매년 약 45억 원의 예산을 잡아먹으며 모의 훈련용으로 쓰였고 그 밖의 기간에는 스탠바이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정부가 원래의 주인에게 땅과 시설을 되팔았다. 시설까지 팔았다는 것은 국가기밀로써의 가치도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패리쉬 가족은 켈베돈 비밀 벙커를 냉전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핵의 위험성을 알리는 역사박물관으로 개방했다. 그 안에는 1992년 이전까지 사용됐던 컴퓨터와 통신장비 그리고 각종 시설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국이 핵 공격을 받으면 공영방송 BBC도 켈베돈 벙커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매뉴얼에 따라 이렇게 방송을 해야 했다.
“이것은 전시 방송입니다. 영국은 핵 공격에 휩싸였습니다. 피해 상황은 파악 중입니다. 도로와 공항은 군사작전을 위해 통제되고 통신은 잠정적으로 중단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라디오를 현재 주파수에 고정시키고 침착하게 집 안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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