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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심장 가까이 - 런던 메이페어 1 (지미 헨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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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대의 쇼핑가

리전트스트릿
크리스마스 시즌의 리전트 스트릿

런던 중심에 있는 옥스퍼드 스트릿(Oxford Street)과 리젠트 스트릿(Regent Street)은 유럽 최대의 쇼핑가다. 두 길의 거리를 합치면 각각 1.9km와 1.3km로 총 3.2km에 이른다. 리젠트 스트릿은 1819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건축가 존 나쉬(John Nash)가 작정하고 쇼핑 거리로 조성한 곳이다. ‘리젠트’라는 이름은 당시 왕 조지 4세(George IV)가 왕자였던 시절의 칭호, 프린스 리젠트(Prince Regent)에서 따왔다. 조지 4세는 존 나쉬와 각별히 친하게 지내면서 버킹엄 궁전과 윈저성을 리모델링하고 바닷가 브라이튼에 인도의 타지 마할을 본딴 새로운 왕궁(Royal Pavilion)을 짓도록 하는가 하면 리트 파크와 리트 스트릿을 조성하는 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는 ‘영국의 첫 번째 신사(The first gentleman of England)’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매너와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왕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폼생폼사였고 그만큼 사치스러웠다는 말이 되겠다. 그는 왕자였던 시절부터 빚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펑펑 써대서 의회가 백성의 혈세를 동원해 메워줄 정도로 사치가 심했다. 어려서부터 ‘지나친 섹스, 지나친 패션, 지나친 체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낭비와 방종이 도를 넘는 인물이었다. 말년에 이르도록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130kg이 넘는 고도 비만과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그의 개인 보좌관은 일기에 “그처럼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경멸스러운 존재는 없다. 그는 최악의 왕이다”라고 남겼다고 한다. 그래도 미술과 건축, 음악과 과학에 식견이 깊어 그 분야에 대한 지원만큼은 다른 어느 왕보다도 화끈했다. 리트 스트릿은 그런 왕이 후세에 남겨준 선물인 셈이다. 

옥스퍼드 스트릿은 원래 로마가 동쪽의 에섹스(Essex)와 서쪽의 햄프셔(Hampshire)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길이었다. 원래 이름은 비아 트리노반티나(Via Trinobantina)인데 중세시대에는 타이번 로드(Tyburn Road)로 불렸다. 18세기 이전까지 옥스퍼드 스트릿은 죄수들의 목을 매달아 공개처형하는 교수대(Tyburn Gallows) 때문에 유명한 곳이었다. 교수대는 하이드 파크와 만나는 마블아치에 있었는데 근처 펍에서는 처형에 사용한 밧줄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가히 엽기적인 취향이라고 할 밖에. 타이번 로드가 옥스퍼드 스트릿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1729년 옥스퍼드 백작이 주변에 땅을 구입하면서부터였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옥스퍼드 스트릿 주변에 주택과 극장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1783년에는 교수대도 철거됐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상점들이 거리를 채웠다. 1909년에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백화점 셀프리지(Selfridge, 제일 큰 백화점은 헤롯이다)를 시작으로 대형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섰다. 셀프리지 백화점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공습으로 2번이나 폭격을 당했는데 영국 정부는 그 지하에 비밀 통신 시설을 만들어 운영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플랭클린 루스벨트 사이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핫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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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포토/ 옥스포드 스트릿

옥스퍼드 스트릿과 리트 스트릿, 그 길고 긴 길은 365일 사람들로 넘친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거리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쇼핑객들로 걷기조차 힘들어진다. 그런 두 거리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 있다. 런던에서 가장 비싼 지역이다. 런던에서 가장 비싸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말과도 같다. 바로 메이페어(Mayfair)다. 1686년부터 1764년까지 매년 5월이면 박람회가 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5월 1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가축시장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곡예사, 불쇼 같은 길거리 공연과 돈을 걸고 맨주먹싸움이나 펜싱, 음식 먹기 대회를 여는 도박행위, 거기에 더해 매춘까지 성행하는 장소가 됐다. 당연히 폭력과 범죄도 만연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주민과 그 지역을 관장하던 코벤트리 백작이 박람회 반대 운동을 펼쳤고 결국 행사는 중단되었다. 오늘날 메이페어는 경제력 상위 1%의 부자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으로 변신했다. 세계 각국의 공관과 대사관, 고급 레스토랑, 호텔, 클럽 그리고 루이비통과 샤넬, 버버리와 에르메스 같은 값비싼 패션 브랜드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고 비싼 그림이나 조각품을 파는 갤러리도 많다. 소더비 경매장도 메이페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더비 경매장(Sotheby’s)은 크리스티(Christie’s)와 함께 예술품 경매계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둘 다 런던에서 탄생했는데 소더비가 1744년에 먼저 문을 열었고 22년 후인 1766년에 크리스티가 문을 열었다. 두 회사 모두 기록을 갈아치우는 고가의 경매가 이루어질 때마다 미디어에 이름을 장식해 왔기 때문에 예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회사다. 소더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경매는 아마 뱅크시의 작품이 팔리던 순간일 것이다. 2018년 10월 5일 ‘풍선과 소녀’라는 제목의 뱅크시 작품이 소더비 경매장에 나왔다. 그림은 15억 원에 낙찰됐다. 그런데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장내에 울리는 순간 그림이 액자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국수가락처럼 잘리기 시작했다. 예의 그 뱅크시가 또 한 번 예술계를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었다. 액자 안에는 파쇄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파쇄기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작품 전체가 파쇄되지는 않았지만 작품이 훼손된 만큼 구매자는 구매를 취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매자는 작품을 그대로 인수하고 ‘쓰레기통의 사랑’이라는 새 작품명을 붙였다. 뱅크시는 다음날 인스타그램에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라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래전부터 준비한 퍼포먼스였음을 밝혔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져 버렸다(Going Going Gone)”라고 포스팅했다. 그것이 그가 붙이고 싶었던 퍼포먼스 제목이었던가 보다. 

메이페어에는 지금도 자주 들르는 단골 펍이 있다. 에이베리 로우(Avery Row)에 있는 아이언 튜크(The Iron Duke)다. 아주 작은 펍인데 퇴근 시간 전에 가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나는 2층 창가 자리를 특히 좋아한다. 그리고 어쩌다 사치가 부리고 싶어질 때면 펍 뒷골목에 있는 랑카셔 코트(Lancashire Court)로 들어간다. 아주 좁은 골목 안이라서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인데 업소들이 내놓은 야외 테이블이 골목을 장식하고 있다. 맥주나 칵테일을 시켜놓고 느긋하게 앉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장소다. 물론 비싸기 때문에 약간의 허세와 호기를 장착하고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내가 그 장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그곳에 있으면 좋은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술은 위를 채우지만 그 기운은 영혼을 채운다. 런던을 돌아다니다 보면 건물 벽면에 파란색 원형 동판이 붙어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역사적인 장소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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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포토/ 헨델과 헨드릭스가 살던 집

메이페어 브룩 스트릿(Brook Street)에 있는 25번지와 23번지는 건물색만 다를 뿐 한 건물이다. 크기와 창문 모양, 창문 개수까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그 두 건물 벽에 파란색 동판이 하나씩 붙어있다. 하나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고, 다른 하나는 작곡가 프리드리히 헨델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다. 두 건물은 각각의 번지수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입구도 하나고 내부도 연결된 한 공간이다. 박물관으로 꾸며진 지금, 2층은 헨델이 3층은 헨드릭스가 차지하고 있다. 박물관의 전면은 브룩 스트릿이지만 방문객을 위한 입구는 건물 뒷면, 랑카셔 코트(Lancashire Court)에 있다. 방문객은 두 음악가가 사용하던 침실과 작업실, 기타와 피아노, 사진과 그림, 초상화, 전화기와 각종 소품들을 남의 집 구경하는 느낌으로 둘러볼 수 있다. 

헨델과 헨드릭스에게는 한집에 살았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이방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시대를 초월해 천재로 평가받는 음악가였다는 것.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사람이었고 헨델은 독일사람이었다. 헨델은 1723년부터 1759년까지 거의 40년 동안 25번지에 살았고 헨드릭스는 1968년부터 1970년 사망 전까지 약 2년간 23번지에서 살았다. (뒷 글 '심장 가까이-런던 메이페어 2'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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