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 '영원한 자유,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1'에 이어)
앞서 언급했던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묘도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다. 나는 감히 그가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2012년에 그가 사망한 후 학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연구와 미디어의 언급이 많아지고 있다.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따랐던 칼 마르크스만큼이나 문제적 인물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해본다.

그는 9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20세기 초에 태어나 21세기 초까지 거의 한 세기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연구하고 기록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종이에 파묻혀 연구만 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답게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유럽의 여러 공산당원들과 교류하고 노동자들의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행동파였다. 그런 만큼 그의 주장은 언제나 분명하고 명쾌했다. 그래서 가끔씩, 때로는 자주 학계나 대중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에릭 홉스봄의 이력은 그 자체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는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을 시작한 1917년,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는데, 에릭의 나이 12살 때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14살 때 번역가였던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릭과 그의 여동생이 고아원 신세를 지지 않았던 것은 친삼촌 덕분이었다. 삼촌은 조카들을 입양해 자식처럼 거두어 주었다. 에릭은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나치와 공산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과열된 정치 분위기 속에서 독일 청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반 강제였지만 공산당에 대한 매력도 작용했다. 에릭의 부모는 심하게 가난했다. 삼촌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어 궁핍한 상태였다. 그는 초라하고 주눅 든 아이였다. 그런데 공산당이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떳떳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큰 위로를 받았다. 그가 16살 되던 해에 히틀러가 집권을 했다. 운이 좋았다. 나치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전에 삼촌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정치적 박해가 이유는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 것뿐이었다. 사실 에릭의 아버지는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 국적의 유대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에릭도 영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를 난민이라고 생각했다. 19살이 되어 에릭 홉스봄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고 사회주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그 무렵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그는 참전했다. 그리고 공병대와 육군 교육대에서 근무했다. 육군 교육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해외 근무 금지 명령을 받고 제대를 신청했다. 1946년, 제대한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사회적응을 도와주는 BBC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적임자로 지목돼 임명 단계까지 갔다. 하지만 영국 중앙정보부(MI5)가 에릭에 대한 사찰 정보를 BBC에 넘겼고 BBC는 즉시 그의 임명을 취소했다.

그는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버벡 대학교(Birkbeck University)에서 간신히 역사학 강사 자리를 얻었다. 에릭은 오랫동안 정보부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느 대학도 정식으로 그를 고용하려 하지 않았다. 버벡 대학교에서의 강사생활은 무려 23년이나 계속됐다. 그러다가 1970년, 마침내 정교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식 교수로 12년을 보내고 1982년 퇴임해 명예교수가 됐다. 그 시절, 미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영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매카시즘(McCarthyism)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시즘을 가르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에릭은 그 영향으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거부당하고 버벡 대학교에서도 잠시지만 교수직을 정지당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늦게 교수가 됐지만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객원교수, 영국 아카데미 회원,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됐고 2002년에는 버벡 대학교의 총장이 됐다. 그는 언어 능력도 뛰어나서 영어뿐 아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포르투갈어와 카탈루냐어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에릭 홉스봄은 방대한 역사서를 셀 수 없이 많이 펴낸 공격적인 저술가였다. 뿐만 아니라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다양한 인쇄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데도 적극적인, 열정 넘치는 학자였다. ‘가디언’에서 마르크시즘 특집을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기사 중 3분의 1이 홉스봄의 기고문이거나 인터뷰였다. 문학적 재능도 겸비해서 인기도 단연 최고였다. 혹자는 그를 영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라고 극찬한다. 반면 어떤 이는 사과할 줄도, 죄책감을 가질 줄도 모르는 고집불통 역사학자라며 깎아내린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학문적 깊이와 그가 역사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은 평생 공산당원이었지만 정치적 활동이나 영향력은 미미했으며 책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공산주의를 고집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부자들에 대항해 가난한 사람들이 해방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 활동을 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영국 공산당이 너무 독단적이며 비지성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개혁을 위해서는 다른 좌파 정당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실제로 그는 선거에서 노동당 토니 블레어를 돕기도 했다. 나중에 토니 블레어를 바지 입은 마가렛 대처라며 비난했지만. 제3의 길을 가겠다던 토니 블레어가 집권 뒤 신자유주의 행보로 일관했으니 충분히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당수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지만 친미와 친자본주의적인 행보로 노동당을 좌에서 우로 끌어다 놓았다.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던 조지 갈러웨이(George Galloway)는 토니 블레어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끌었던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토니 블레어의 거짓과 위선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금했는데 원래 목표액이었던 5만 파운드보다 3배 많은 16만 4천 파운드 (약 2억 5천만원)가 모금됐다. 그러나 독립 영화관에서 한 달 정도 상영한 후에 사라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 레닌과 함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가 저지른 살인과 폭정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고 스탈린에 대한 거센 성토가 국경을 넘어 번져나갔다. 따가운 시선이 스탈린을 지지했던 영국 공산당을 향했다. 난감한 상황에 놓인 당은 침묵을 선택했다. 에릭 홉스봄은 그런 당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영국 공산당이 자신들의 오류와 거짓말을 대중 앞에 솔직하게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공산당과 에릭을 감시해 온 영국 비밀정보부 MI5는 ‘에릭은 공산당 내에서도 위험인물로 분류됐으며 왕따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산당 당적을 버리지 않았다. 다 떠나고 한 줌밖에 남지 않은, 군소정당 축에도 못 드는 초라한 당인데도 말이다. 그는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고 물으면 항상 “절망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항상 유머가 넘쳤으며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재즈와 영화,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불편해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게 세상을 직시하는, 천상 학자였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를 천천히 걸으면서 묘비를 살펴보면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이름들이 많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이다. 케어리스 위스퍼(Careless Whisper), 페이스 (Faith), 웨이크 미 업 비포유 고고)Wake Me Up Before You Go Go)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마다 울려 퍼지는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를 부른 바로 그 가수 말이다. 조지 마이클은 영국 음반 차트와 미국 빌보드 1위 자리를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그래미,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같은 상을 휩쓸었던 전설적인 가수였다. 그런 그에게 비밀스러운 직업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얼굴 없는 기부천사’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무료공연을 하거나 왼손이 모르게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사망 후에도 상당한 유산을 다양한 자선단체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부른 조지 마이클은 201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201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가장 가깝게 지내던 누나가 사망했다. 조지 마이클은 53세, 누이는 59세였다. 둘은 함께 엄마 곁에 묻혔다. 묘지에는 엄마의 비석(Lesley Panayiotou)만 있고 조지 마이클과 누이의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도굴과 훼손을 우려해서다. 살아생전, 내내 극성팬과 파파라치에 시달린 유명 연예인이니 조용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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