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 '영원한 자유,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2'에 이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는 이렇게 유명 인사들이 많은데 그중 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다. 그는 의약품과 플라스틱, 폭약 등을 만드는 주요 물질인 벤젠을 발견한 사람이다. 암모니아나 이산화탄소, 염화수소 등을 액상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나프탈렌의 분자 구조를 알아낸 사람도 마이클 패러데이다. 그러나 그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건 ‘전자기 유도법칙’이었다. 그는 자석같이 밀어내고 당기는 힘으로 전기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기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세탁기, 청소기, 믹서기, 자동차, 각종 농기계 그리고 발전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이는 모터가 그의 발견으로 탄생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근본을 파고들면 패러데이의 연구와 닿아있다. 실제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에는 선배 과학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아이작 뉴턴, 제임스 멕스웰 그리고 마이클 패러데이었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은 스타급 과학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비결 중 하나가 인생역전, 성장환경에 있었다. 그는 1791년에 가난한 대장간 견습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패러데이는 집안 형편상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고 한 서점의 보조직원으로 취직했다. 서점에서 일을 한 덕분에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패러데이는 과학에 흥미를 느끼고 과학 강연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거기서 만난 한 과학자와 인연을 맺고 그의 조수로 채용이 되면서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뼛속까지 겸손이 몸에 배어있는 데다가 신념과 주관도 뚜렷해서 과학자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다. 신념과 주관을 잘 지키려면 일단 잘나야 하고 탐욕과 욕심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살면서 거절하는 법을 잘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작위를 수여하겠다는 왕의 호의에 대해 ‘패러데이 경’이 아니라 평범한 ‘미스터 패러데이’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뿐 아니라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장 자리도 두 번이나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에 사용할 화학무기 개발 요청을 비롯해 여러 차례 정부의 부름을 받았지만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모조리 거절했다. 하지만 탄광 노동자를 위한 폭발사고 검증이나 템스 강 오염조사, 등대 개선사업 등에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과학강연도 열심이었는데 그가 매년 크리스마스 때 진행한 크리스마스 과학강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과학자로서 그의 인기는 영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간단히 열거를 해보면 일단 런던 공학기술 연구소(Institution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앞, 사보이 플레이스(Savoy Place)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생가 Newington Butts 근처,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 Castle)의 원형 교차로 한복판에는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라고 하기엔 너무 큰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박스 형태의 건물이다. 안에는 전기 변전소가 있는데 원래 유리로 만들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디자인했지만 범죄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해 현재의 재질로 바꿨다고 한다. 런던 중심 메이페어(Mayfair)에는 패러데이 박물관이 있다. 그밖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공원, 학교, 거리, 연구소, 건물 등은 전 세계에 걸쳐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0파운드권 지폐에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패러데이의 성격상 이런 요란 스러운 인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쩌겠나,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 허락을 구할 수도 없게 된 것을. 패러데이는 1867년 8월 25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패러데이 정도의 월드 클라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질 그리고 스티븐 호킹 같은 위인들이 모여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소박하게도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이 임종을 앞둔 그에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그가 거절했다. 이쯤 되면 그는 ‘거절의 왕’이다. 여왕은 아이작 뉴턴 옆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를 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저자 줄리안 반스가 영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극찬한 작가 조지 엘리엇(본명 메리 앤 에번스), ‘사회진화론’으로 가장 위대한 19세기 철학자이며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테판(Leslie Stephen) 그리고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등으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대표작가 찰스 디킨스의 부모와 동생들이 모두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여인, 캐서린 디킨스(Catherine Dickens)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 최고의 위인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등으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대표작가 찰스 디킨스의 부모와 동생들이 모두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여인, 캐서린 디킨스(Catherine Dickens)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 최고의 위인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런데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이렇게 대단한 인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악명이 높은 인물들도 있다. 브루스 레이놀드(Bruce Reynolds)는 영국 범죄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이다. 조지 엘리엇이나 마이클 패러데이 같은 사람이 알면 깜짝 놀라 영면에서 깨어날 수도 있다. 레이놀드는 1963년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향하던 현금 수송 열차를 털어 2,60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5,500만 파운드), 우리 돈 약 870억 원을 챙긴 조직범죄단의 두목이었다. 그가 저지른 ‘대열차 강도 사건(Great Train Robbery)’은 수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 그리고 소설과 회고록으로 나왔을 만큼 역대급 범죄였다.
영국의 교회는 공동묘지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교회 바닥도, 정원도 비석으로 가득하다. 그중 압권은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과 총리를 포함해 3천 명이 넘는 국보급 인사들의 시신을 보유(?)하고 있다. 익숙한 이름만 몇 명 나열해 보자면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아이작 뉴턴, 찰스 디킨스, 조지 헨델, 토마스 하디, 윌리엄 터너 등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윈스턴 처칠, 오스카 와일드, 제인 오스틴 등은 다른 곳에 잠들어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에 추모비가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햇볕 좋은 날, 동네 성당 주변의 묘지를 한가롭게 걸으면서 천천히 비석을 살펴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언제 태어나 얼마나 살다 갔는지, 직업은 뭐였는지를 보면 머릿속에서 그 시대,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책 속에서 배운 낯익은 이름이라도 발견하면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갑기도 하고 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쓴 시에 나오는 말로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이다. 묶어보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순간을 낭비하지 말고 즐겁게”라는 뜻이 된다. 그들처럼 흙이 되어 자유롭게 되는 그날까지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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