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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원한 자유,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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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뜻인지 이제 죽어 그렇게 살 수 있게 됐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다행스럽다” 정도의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가 그에게 딱 맞는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측정이 불가능한 추상적 개념이다. 똑같은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누구나 똑같은 정도의 ‘자유’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진부하고 따분하게 들리지만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자유’ 또한 그런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 보면 카잔차키스가 생각하는, 그래서 닮고 싶은 자유로운 영혼이 조르바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소설 속 조르바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유다”라고 말하는 카잔차키스에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라고 말해줄 밖에. 그게 비록 ‘정신승리’라고 해도 말이다. 만약 그가 나는 “원하는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는데 자유롭지도 못하다”라고 했다면 뭐라고 할 텐 가. 실제로 욕심을 다 내려놓고 살아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자유를 얻겠답시고 발버둥 치다 북망산천을 넘고 마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한 비석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한 비석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이야기를 한다는 게 너무 멀리 돌았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런던 북쪽, 꽤 잘 사는 동네 한복판에 있다. ‘동네 한복판에 공동묘지라니’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영국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일종의 공원처럼 생각한다. 묘지는 유령이 득실대는 혐오시설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쉼터다. 세상에 공동묘지는 많다. 그런데 유독 하이게이트가 유명하다. 그래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조각공원처럼 흥미롭고 다양한 모양의 비석, 중세 고딕 스타일의 납골당, 우거진 숲과 야생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거라면 더 잘 꾸며진 공동묘지가 얼마든지 있다. 진짜 이유는 한 남자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말이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1839년에 문을 열었다. 런던 묘지 회사(The London cemetery Company)가 이국적인 식물을 들여와 정원을 디자인하고 독특한 건축물을 세워 묘지를 꾸민 덕에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이름 꽤나 날리던 예술가,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가들이 최후의 안식처로 하이게이트를 선택했다. 칼 마르크스가 하이게이트에 묻힌 건 1883년이었다. 그의 나이 64세가 되던 해다. 그의 주소가 하이게이트에서 가까운 41 마이틀랜드 파크 로드 (41 Maitland Park Road)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 잘 알려져서 긴 설명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설명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칼 마르크스의 흉상
칼 마르크스

철학자, 사상가, 경제학자, 언론인으로 살면서 사회주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고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했으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쓴 사람. 금수저로 태어나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평생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의 편에서 펜을 들었던 사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을 묘비에 새겨 넣은 사람. 돈을 버는 재주보다는 쓰는 재주에 능하고 금욕적이거나 절제된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 고향 독일에서 쫓겨나고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도 쫓겨나 겨우 런던에 정착했지만 34년 영국살이 중 4번이나 이사를 했던, 참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사람.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쫓겨나지도 않고 떠돌 필요도 없이 정착한 곳이 하이게이트다. ‘생각은 자유’라고 한다. 타인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나와 다른 생각을 억압하면 안 된다고 배우고 가르친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세상의 모든 국가가 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19세기,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마르크스에게 생각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운영한 언론사는 검열당하고 탄압받았으며 그와 가족은 살던 나라에서 쫓겨났다. 마르크스는 허황된 세상을 꿈꾸는 몽상가, 노동자들을 희망으로 고문하는 선동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불순분자로 취급당했다.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각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 같은 류의 사람들이 누리는 ‘생각의 자유’는 흉기와 같아서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런 사람들은 죽은 후에까지 마르크스의 무덤에 찾아가 침을 뱉었다.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려 저주를 퍼붓는 것은 기본이고 망치로 부수기도 하고 사제폭탄을 터트리기도 했다. 묘지 관리자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에 대한 혐오는 무덤에서 그치지 않았다.

소호에 있는 마르크스가 살던 집
소호에 있는 마르크스가 살던 집

영국 문화유산(English Heritage)이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에 유적지 명패를 붙이자 마르크스 혐오주의자들이 몰려와 명패를 훼손했다. 이후 다시 붙였지만 또 공격을 했고 세 번째 다시 붙이려 했지만 이번엔 거듭된 공격에 두려움을 느낀 집주인이 거절해 포기해야 해야 했다. 지금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런 일이 보도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혹은 그를 추모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칼 마르크스의 비석과 흉상은 1930년에 조각가 로렌스 브래드쇼(Laurence Bradshaw)가 제작해 헌정한 것이다. 로렌스는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이었다. 그는 칼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그의 사상과 철학도 함께 담으려 했다. 높다란 반석 위에 올려져 있는 칼 마르크스의 흉상을 실제로 보면 정말 크다. 로렌스 브래드쇼는 그 큰 얼굴 흉상에 대해 지성과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지만 건축가 클레이브 애슬렛(Clive Aslet)은 “과하다”는 말로 깎아내렸다. 누구 말에 공감을 하든 그건 보는 이의 마음일 테다. 마르크스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 참석자는 13명이었다는 말도 있고 30명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하지만 오늘날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그 어느 망자의 묘와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영국 문화유산에도 1등급 유적지로 등재돼 있고 말이다. 

몇 해 전 꽤 많은 경제학자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칼 마르크스는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제학자다. 그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어도, 그에 대해 잘 몰라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만났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경제학자도 있었다. 시간도 없고 인터뷰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랬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칼 마르크스는 이름만 올려도 불편한 혹은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문제적 인물이구나.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들었다. 마르크스를 경제학자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념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도 실패한 것일까? 마르크스를 평생 연구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독일과 러시아의 좌파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15~47%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금융 불안과 사회적 불평등이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는 앞으로도 스테디셀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것도 “마르크스는 틀렸다” 혹은 “마르크스는 실패했다”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이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사상이나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관심 밖이다. 그건 내가 가진 정도의 지식과 이해력으로는 논할 수 없는 높은 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자유로웠는가, 그는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가정적으로 어린 자식을 둘씩이나 앞세운 남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로웠다”라고 말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롭기 위해 평생 치열하게 싸웠다는 것.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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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이드 사진: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길 하나 사이로 동쪽 묘지(East)와 서쪽 묘지(West)로 나뉘어있다. 마르크스의 묘는 서쪽 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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