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아니면 가급적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속도를 즐기지 않을뿐더러 장시간 이어지는 단조로운 풍경이 피로와 졸음을 부르기 때문이다. 국도나 시골길을 이용하면 길을 따라 피어난 꽃과 나무, 숲과 초원을 감상할 수 있다. 멈추고 싶을 때 언제든 멈추고 쉬어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마을을 발견할 기회도 생긴다.
그날도 그랬다. 두어 시간 건조한 차 안에만 있었더니 눈이 뻑뻑했다. 그래서 조금 쉬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른 마을이었다. 골목 하나를 통과하니 중세시대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Market Place)이 펼쳐졌다. 마을 구경이 하고 싶어 졌지만 카페인 충전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찻집을 찾았다. 쇼윈도가 하얀색 격자무늬 창으로 되어있고 입구를 가로지르는 묵직한 대들보가 간판 역할을 겸하고 있는 빨간색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들보에 중세 고딕체로 ‘Established 1720’ 그리고 그 위로 ‘Ye Oldest Chymist Shoppe In England’라고 쓰여 있었다. 그 건물 2층이 찻집(Tea Room)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을 이렇게 우연히 발견하다니, 미국 시애틀로 출장을 갔을 때 무심코 들어간 스타벅스가 1호점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런 우연이?” 하고 놀랐던 때가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기분 좋은 ‘우연’을 기대하며 산다. 영국에서는 첫 번째지만 전 세계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라고 했다. 중국에 53년 앞서 문을 연 약국이 있다며. 그런데 그곳은 더 이상 약국은 아니었다. 한쪽 벽에 전시된 오래된 약과 약병들이 그곳이 한때 약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1층에서는 약 대신 사탕과 과자, 초콜릿과 찻잔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오래돼 반들반들해진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간 2층은 밖에서 본 대로 찻집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빅토리아시대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차와 케이크를 나르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그 마을의 이름은 ‘Knaresborough(네스버러)’였다. 글자만 봐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천 년 이상,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생긴 마을인 것은 분명 하지만 주목할 만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마을의 생김새처럼 아기자기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네스버러는 미국 뉴욕의 원조 이름인 천년 고도 요크(York)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요크셔데일 국립공원 사이에 있다. 1100년대에 노르만족이 들어와 상업과 무역을 하면서 성장한 곳으로 마을에 있는 성과 교회가 그 무렵에 생겼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150m쯤 걸으면 다 무너지고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성이 있다. 한 줌이지만 그래도 그 성에 올라서면 마을과 니드 강(River Nidd)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언뜻 보면 처절했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잔해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영국, 아니 잉글랜드의 역사 한 토막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앞서 ‘5대 600으로 맞짱뜬 여자’에서도 언급했지만 잉글랜드는 시민전쟁이라고 하는 내전을 여러 번 겪었다. 그것은 왕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왕당파(Royalist)와 의회의 동의를 거쳐 통치해야 한다는 의회주의파(Parliamentarians)와의 다툼이었다. 한편 종교싸움이기도 했는데 왕은 영국 성공회 이외의 종교, 즉 로마 가톨릭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고 의회주의파는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결과는 찰스 1세가 의회주의를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처형됐고 로마 가톨릭이 허용됐다. 그리고 1689년에 윌리엄 3세가 권리장전에 서명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네스버러 성은 1644년, 그러니까 시민전쟁 초기에 의회주의파에 의해 함락돼 철거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주민들이 몰려들어 성벽을 부수고 돌들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 아름다운 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백성이 그 수혜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긍정적인 역사로 봐도 될 듯하다.
높다란 다리 위로 증기기관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간다. 다리 아래로는 니드 강이 흐른다. 강변엔 작은 보트들이 대여섯 대씩 한 몸으로 묶여있고 간간이 출렁이는 강물에 떠밀려 서로의 몸을 부댄다. 마을 쪽 강변은 체스판 무늬를 입은 돌집과 파라솔을 펼쳐놓은 노천카페와 잘 꾸며진 정원을 갖춘 집들이 언덕 위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반대편은 산마늘 꽃 흐드러진 숲길이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길 끝에 서면 연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낮은 강이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토닥이며 굽이굽이 흐른다. 네스버러엔 그렇게 화가라면 그림으로 담고 싶고 사진가라면 사진으로 담고 싶어 할 동화 같은 풍경이 있다. 그런데 동화 같은 풍경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엔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마녀 이야기인데 동화가 아니라 역사다. 실제 존재하던 마녀라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처럼 적당한 거리는 유지하고 듣는 게 현명할 것이다.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 할지는 여러분의 자유다.
동굴에서 태어난 아기
때는 헨리 7세가 왕좌에 있던 1480년대, 노스 요크셔(North Yorkshire)의 네스버러라는 마을에 마녀 아가사 수스테일(Agatha Soothtale)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가족이 없는 고아였으며 거처는 니드 강가에 있는 동굴이었다. 아가사 수스테일은 아기를 갖기 위해 매력적인 악마를 불러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1488년,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몰아치던 어느 날 여자아이를 낳았다. 다른 버전의 출생 이야기도 있는데 아가사가 너무 고독하고 가난한 고아여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아이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두 버전은 공통적으로 아기가 태어나자 천둥 번개가 멈췄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아기는 첫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대신 낄낄대며 첫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아기의 이름은 어슐라 손스일(Ursula Sontheil)이었다. 어슐라 손스일은 몸집이 크고 꼽추 등에 비뚤어진 코와 튀어나온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겨우 15살이었던 엄마 아가사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아기를 포기하고 동굴을 떠났다. 어슐라의 나이 두 살 때였다. 아기 어슐라는 동굴 속에서 그녀를 발견한 마음씨 착한 마을 여인의 손에서 자랐다. 여기에도 다른 버전이 존재하는데 베버리(Beverley)라는 이웃 마을의 수도원장이 둘을 동굴에서 데려다가 엄마 아가사는 수녀원에서 살도록 하고 딸 어슐라는 네스버러의 한 가족에게 입양을 보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엄마랑 헤어진 후 어슐라는 식물과 약초에 대해 배우면서 자랐다. 그녀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수양 엄마의 심부름으로 교회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모임을 위해 교회에 모인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쭈그렁 방탱이”, “악마의 서자”라고 소리치며 놀렸다. 그녀는 무시하고 걸었다. 그런데 남자들이 모임을 위해 자리에 앉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남자가 입은 옷의 털깃이 변기 시트로 변했다. 목에 변기 시트가 씌워진 모습을 보고 옆에 앉았던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가 변기로 변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놀라고 웃느라 난리가 났다. 교회 관리인이 소란스러운 이유를 살피러 달려갔다. 그런데 그의 머리에서 엄청나게 큰 한 쌍의 뿔이 자라기 시작하더니 그가 문을 막 통과하려는 순간 뿔이 너무 커져서 문에 걸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모두들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어슐라를 놀리지 않았다.
약초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면서 어슐라를 찾는 마을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녀에 대한 존경심도 높아졌다. 그러다가 목수 토비 쉽튼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스물넷이 되던 해 토비 쉽톤과 결혼했고 그때부터 어슐라 손스일의 이름은 어슐라 쉽톤이 됐다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질 때쯤 마더 쉽톤으로 불리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두고 마더 쉽톤이 토비 쉽톤에게 마법을 건 게 틀림없다며 쑥덕거렸다. 비록 흉측한 외모를 지녔지만 그녀는 착한 마법사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이웃 여인이 찾아와 집에 도둑이 들어서 옷을 훔쳐갔다며 도움을 청했다. 마더 쉽톤은 여인을 안심시키고 다음 날 함께 마을 장터로 갔다. 마더 쉽톤이 장터에 도착하자 도둑이 훔친 옷 중 하나는 입고 하나는 손에 걸치고 나타났다. 도둑은 “나는 이웃의 옷을 훔쳤어요. 나는 도둑이에요”라고 중얼거리며 마더 쉽톤을 향해 춤을 추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마더 쉽톤 앞에 와서는 옷을 건네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한 후 떠났다. 자신의 능력을 좋은 일에 쓰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마더 쉽톤의 인생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면서 위기를 맞았다.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겨우 2년 만에 막을 내렸고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던 숲 속 동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슬픔을 달래며 약초를 채취하고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해 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꽤 용한 치료사 겸 점쟁이였다. 신통하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몰려왔다.
세계대전, 핵미사일, 비행기의 등장을 예언하다
그녀의 예언과 일생에 대한 기록은 많다. 최초의 기록은 1641년, 그녀가 사망하고 80년이 지나 발간된 〈마더 쉽톤의 예언(Mother Shipton's prophecies)〉이었다. 마더 쉽톤이 조안 워커(Joanne Walker)라는 소녀에게 구술한 내용을 소녀가 옮겨 적은 것이었다. 그 이후에 1667년 전기작가 리차드 헤드(Richard Head)와 1686년 제이 코니어스(J. Conyers)가 그녀에 대한 기록을 수집해 책으로 출간했다. <브리타니아(Britainnia)>를 쓴 17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윌리엄 캠든(William Camden)도 그녀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마더 쉽톤이 당대의 왕, 헨리 7, 8세에 대한 예언을 많이 한 탓에 왕실 관련 기록에도 그녀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다. 마더 쉽톤은 당시로서는 꽤 오래 살았다. 1561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교회에서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마녀에게 교회 마당을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녀는 그녀가 살던 동굴 속에 잠들었다. 그녀는 노스트라다무스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예언가로 알려져 있다. 어떤 예언을 했는지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물은 오우세 다리(Ouse Bridge)를 넘어오고, 풍차는 탑에 설치되고,
느릅나무는 모든 사람의 문 앞에 놓일 것이다.
예언가들의 예언은 언제나 읽는 재미를 더한다. 선문답 혹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시에는 없었던 미래의 수도 시스템을 예언한 것이었다. 풀어 말하자면 “풍차를 이용해 퍼올린 오우세 강의 물이 모든 가정에 공급될 것이다. 느릅나무로 만들어진 수도 파이프가 각 가정으로 연결될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이런 예언도 있었다.
미트라를 쓴 공작의 고귀한 울음이 주인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미트라는 라틴어다. 영어로는 미터(Miter)라고 하는데 주교가 머리에 쓰는 관을 뜻한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 헨리 8세는 제대로 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때 국정을 주도하던 인물이 헨리 8세의 수석고문 토마스 웰시였다. 토마스 웰시는 천민 출신이었는데 미트라를 쓰는 추기경의 자리에 올라 왕의 수석고문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은 토마스 웰시의 부상을 예언한 것이었다. 헨리 8세는 그녀를 ‘요크의 마녀’라고 불렀다. 그만큼 왕족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1665년 흑사병, 1666년 런던 대화재를 예언했기 때문이다. 마더 쉽톤은 그밖에도 1, 2차 세계대전, 핵미사일의 등장, 자동차와 비행기의 탄생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알쏭달쏭하면서도 시적인 표현으로 예언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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