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고고학의 선구자-에이브베리 3인방
아이삭 뉴턴의 친구 윌리엄 스턱클레이
(앞 글 '시간여행'에 이어) 윌리엄 스턱클레이(William Stukeley)는 인생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간 인물이었다. 1687년에 태어나 대학을 가기 전까지 변호사인 아버지 밑에서 일했고 대학에 가서 의학을 공부한 후에는 의사로 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로마 동전을 모으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할 때도 틈틈이 도시 밖으로 나가 화석을 채취하고는 했다. 그런 그 인지라 그는 의사가 되어서도 틈틈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고고학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는 1707년에 만들어진 고고학협회(Society of Antiquaries of London)의 초대회장을 지냈고, 1722년에는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영국을 침략했던 로마를 연구하는 로마기사협회(Society of Roman Knights)를 만들었다. 그렇게 본업인 의사와 단체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를 수시로 방문하며 거석문화를 연구했다. 1726년 그는 런던을 떠나 영국 중부 링컨셔(Grantham in Lincolnshire)로 가서 한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직업을 바꾸어 올 세인트교회(All Saints Church)에서 목사로 봉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신을 부정하는 다이즘(Deism)에 대항하기 위해 드루이드를 연구했다. 드루이드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아우르는, 고대 켈트문화권의 최상위 계급이었다. 그들은 법률, 의료, 정치뿐 아니라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이자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모든 드루이드는 스톤헨지를 신성히 여겼다고 하는데 스턱클레이는 그런 고대 드루이드들이 노아의 홍수 말기와 아브라함 시대 사이에 영국에 정착했으며 유일신을 따르는 등 기독교와 여러 부분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애국 기독교인’이 라고 불렀다. 그는 또 고대 이집트인과 플라톤, 드루이드가 모두 삼위일체를 받아들였다며 에이브베리는 드루이드가 삼위일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에이브베리가 기독교 성지인 셈이다 ('사라진 마법사' 참조).
스턱클레이는 1747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대영박물관 건설에 참여하고 친구 아이삭 뉴턴의 초창기 전기를 집필했는데 그 외에도 그가 펴낸 책은 고고학 서적을 포함해 약 20권에 달했다. 그는 여기에 기술한 것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살다가 77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스턱클레이는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를 철기시대 때 드루이드가 세운 사원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잠시 스톤헨지 이야기를 해보면 스턱클레이의 주장과는 다르게 스톤헨지는 기원전이 아닌 기원후에 지어졌다는 주장이 많았다.
1620년 제임스1세는 왕실조사관인 이니고 존스 Inigo Jones에게 스톤헨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이니고 존스는 이탈리아로 달려가 로마유적을 살펴본 뒤 스톤헨지가 투스칸 Tuscan 스타일과 똑같다며 로마시대에 하늘의 신, 우라노스 (라틴어로 카일루스 Caelus)에게 바친 사원이라고 보고했다. 1663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영국 왕실의 주치의로 일한 월터 찰튼(Walter Charleton)이 <춤추는 거대무덤-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스톤헨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는 그 책을 통해 “스톤헨지는 앵글로 색슨 시대 (450~1066)에 영국을 침략했던 덴마크 바이킹의 작품이 확실하다. 덴마크만이 바위를 들어 올리고 옮기는 기술과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톤헨지는 덴마크 왕을 선출하고 대관식을 진행하는 장소였다”라고 주장했다. 에이브베리 역시 스톤헨지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는 영국에 최초로 문명을 전수한 해양 민족,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중세 초기 아더 왕의 마지막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기원전에 미국에서 대서양을 횡단해 건너간 원주민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주장이 무색하게 현대과학, 즉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은 기원전 3000년에서 1600년 사이를 가르치고 있다. 모두 틀렸다는 말이다. 물론 누가, 왜 세웠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스턱클레이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유쾌한 성격에 괴짜 기질도 다분하고 잘난 체를 많이 즐겼던 사람인 것 같다. 학자로 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그는 고고학을 자신이 믿는 신비주의와 종교적 신념을 강화시키는 데 이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1743년에 <에이버리, 영국드루이드성전(Abury, a Temple of the British Druids)>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몇 가지 측정치와 구조를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조작했다. 역사학자 로널드 허튼(Ronald Hutton)도 "스턱클레이는 신비 주의를 추구했고 일정한 개념에 따라 고대유적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스턱클레이의 노력 덕분에 에이브베리에 대한 기록이 남게 됐고 그 기록은 훗날 에이브베리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던 존 루벅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이르러 에이브베리에 인구가 급격히 늘자 유적지 안에 주택건설도 늘었다. 은행가이자, 정치인이면서 고고학자였던 존 루벅(Sir John Lubbock)은 윌리엄 스턱클레이 이상으로 바쁜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사람이 평생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경제와 교육, 고고학 분야에 굉장히 많은 법률을 제정했고 고고학자로써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라는 용어를 만들 어 구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생물학자이기도 했는데 찰스 다윈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다윈의 연구를 돕기도 했다. 은행가로서는 영국 은행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는데 회장으로 있으면서 은행원이 아프거나 사망했을 때 그들의 자녀를 돕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인생을 진정으로 즐겼던 것 같다. 여기에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야에서 소위 ‘장’을 지냈고 또 그만큼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여러 논문과 책을 펴냈는데 그중 하나가 <삶의 즐거움(The Pleasures of Life)>이었다. 사는 게 정말 즐거웠나 보다. 1895년에는 <선사시대(Pre-Historic Time)>라는 책을 썼는데 일곱 번이나 재발행되면서 고고학의 교과서가 됐다. 1870년, 그는 ‘영국-아일랜드 인류학 연구소’의 회장이 되었다. 연구소 회장이 아니라도 그는 에이브베리가 사라져 가는 상황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한 그는 사비를 털어 유적지 내 일부의 땅을 구입하고 사람들에게는 유적지 밖에 집을 짓도록 설득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고대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마련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고학자로서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직접 보호하고 연구하는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재벌 2세였던 엄친아 알렉산더 케일러
알렉산더 케일러(Alexander Keiller, 1889-1955)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전역에 과자와 잼을 판매하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제과업계의 재벌 2세였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은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항공사진작가이자 고고학자로 활동했다. 돈이라면 차고 넘칠 만큼 많았던 그는 에이브 베리를 보존하기 위해 유적지 일대 384만 평방미터 (약 120만 평)를 사들였다. 그리고 발굴작업과 동시에 쓰러지고 훼손된 바위들을 다시 세웠다. 케일러는 고고학 연구소 모번 인스티튜트 (Morven Institute) 역시 사재를 털어 세우고 에이브베리와 주변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The Barn Gallery of the Alexander Keiller Museum)도 만들었다. 박물관에는 음식을 가는 도구나 화살촉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4천 년 된 돌 Flint, 석기시대 그릇, 5500년 전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개의 뼈등이 전시돼 있다. 약 10년에 걸쳐 에이브베리 일대에 대한 조사와 복원을 마친 알렉산더 케일러는 1943년 12,000파운드(약 1800만 원)에 부지에 대한 소유권을 내셔널 트러스트의 손에 넘겨줬다. 12,000파운드는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계산해 보더라도 명목상 비용에 불과하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영국의 문화재와 유적지 그리고 자연을 관리, 보호하는 비영리 시민운동단체이다. 1895년에 세워졌다.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더 케일러는 1922년에 영국 남서부의 고고학 유적지를 직접 항공 조사해서 <하늘에서 본 웨섹스(Wessex from the Air)>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것은 영국 최초의 항공 고고학 서적이었다.
케일러의 사생활을 살짝 엿보자면, 그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이른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유산을 잘 지키고 불려서 재산이 많았다. 고고학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도 말이다. 그는 스물네 살에 첫 번째 결혼을 하는데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참 전한 후 돌아와서는 바로 이혼했다. 이후 이혼과 결혼을 세 번 더 반복하 고 66세의 나이로 1955년에 사망했다. 첫째 부인을 제외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에이브베리의 보존과 발굴 작업에 관여했는데 그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마지막 부인, 가브리엘 케일러 Gabrielle Keiller는 남편 사망 10년 후 인, 1966년에 에이브베리 박물관과 유물을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그녀에게도 알렉산더 케일러는 세 번째 남편이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켜진 에이브베리는 매년 3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물론 백만 명을 훌쩍 넘는 스톤헨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영국, 그 이름의 탄생'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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