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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5대 600으로 맞짱뜬 여자-코프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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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머스(Bournemouth)는 영국 남부의 해안도시다. 큰 도시를 기준으로 동쪽 끝이 도버(Dover), 서쪽 끝이 플리머스(Plymouth)라고 한다면 딱 중간에 있다. 본머스는 깨끗한 휴양도시이자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사는 평화로운 도시지만 대학도시 이기도해서 젊은이들의 활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학교도 많아서 영어를 공부하려는 전 세계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시내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11km에 이르는 긴 백사장이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다. 곳곳에 키 큰 나무와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도 참 많다. 대도시생활로 일과 인간관계에 지친 마음을 추스르기에 딱 좋은, 아담한 도시다. 나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본머스에서 살았고 지금도 해마다 서너 번씩 방문을 한다.

무너진 성의 잔해
돌로 지어진 집들 끝으로 무너진 성의 잔해가 보인다

본머스 주변에는 아름다운 장소가 정말 많은데 나는 스와니지(Swanage), 그중에서도 코프캐슬(Corfe Castle)이 특히 좋았다. 육지를 통해 갈 수 도 있지만, 나는 항상 샌드뱅크(Sandbanks)에서 페리를 타고 스와니지로 넘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샌드뱅크는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 와 있는 만灣이다. 윈드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인데 풍경도 아름다워서 지구에서 4번째로 비싼 곳이라고 할 만큼 최고급 주택이 즐비하다. 샌드뱅크 끝에는 페리가 오가는 나루터가 있다. 페리는 버스나 자가용 같은 각종 이동 수단과 사람을 태우고 5분 내에 스와니지에 내려준다. 차로 30분쯤 들어가면 언덕 위에 성이 보인다. 코프캐슬이다. 키 작은 돌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이고, 성뿐 아니라 마을도 그냥 코프캐슬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돌집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스와니지가 유명한 석회암 산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해안가 절벽에 동굴이 많은데 대부분 돌을 채취하던 채석장의 흔적이다. 코프캐슬은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 회사 웨지우드와 공급계약을 맺을 정도로 질 좋은 점토 생산지이기도 했다. 1796년 기록에 보면 마을주민 96명 중 55명이 점토를 채취하는 채석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나온다.

코프캐슬 마을 전경
코프캐슬 마을 전경

성은 마을 끝 지점에 계곡처럼 아래로 푹 꺼졌다가 봉긋하게 솟은 언덕 위에 있다. 55m 언덕 위에 21m 높이로 지어진 성이다. 잉글랜드에서는 언덕이나 산처럼 높은 지점에 성을 쌓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 강을 건너는 길목 혹은 교통의 요지에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코프캐슬은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코프캐슬이 지어진 1066년, 11세기 성의 주재료는 흑과 나무였다. 그런데 코프캐슬은 부분적으로 돌을 사용했다. 성을 돌로 짓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였고, 코프캐슬도 그때 완전히 돌로 개조했는데 10년 동안 매년 3~4m씩 올려 1105년 완료했다고 한다.

코프캐슬
코프캐슬 전경

코프캐슬은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성을 크리스토퍼 해튼이라는 사람에게 팔았고 그것을 다시 메리 뱅크스 부인부인(Lady Mary Bankes)이 사들여 사용하고 있었다. 메리 뱅크스 부인은 찰스 1세의 법무상이자 수석 재판관인 존 뱅크스(Sir John Bankes0의 아내였다.

한때, 영국은 국가의 통치권을 놓고 의회파(Parliamentarian0와 왕당파(Royalist) 로 갈라져 긴 내전(1642~1651)을 치렀다. 이른바 시민전쟁 Civil War이었다. 첫 내전은 뱅크스 부부가 코프캐슬을 구입하고 7년쯤 지난 시점에 시작됐다. 1643년, 남편 존 뱅크스가 찰스 1세와 함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 그동안 메리 뱅크스 부인은 코프캐슬을 지키고 있었다. 코프캐슬을 포위하고 있는 의회군은 600명이었다. 그런데 메리 부인과 함께 코프캐슬을 지키는 군인은 고작 5명이었다. 하녀들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600명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의회군은 메리에게 순순히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의회군은 수시로 습격을 감행했다. 그때마다 메리와 하녀들 그리고 5명의 병사는 돌과 뜨겁게 달군 석탄을 의회군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자그마치 6주를 버텼다.

결국 의회군은 1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600명이 고작 십수 명이 지키고 있는 성 하나를 접수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게 사실일까? 의문이 들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인 1645년, 의회군이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코프캐슬을 포위했다. 잉글랜드 남부는 모두 의회군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고 코프캐슬은 왕당파에게 남은 마지막 요새였다. 메리는 이번에도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저항은 오래가지 않아 허무하게 끝났다. 메리의 부하 피트맨 대령대령(Colonel Pitman)이 몰래 성 뒷문으로 빠져나가 항복을 하고 120명의 의회 군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의회군은 겉옷을 뒤집어 입고 들어와 메리의 군대로 오인하도록 하는 작전까지 구사했다. 메리는 저항할 틈도 없이 포로가 됐고 성은 의회군의 손에 넘어갔다.

부하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메리는 코프캐슬을 지킬 수 있었을까? 철학자 플라톤은 여성도 병법을 배우고 체력을 다지면 군대와 함대를 지휘할 수 있는 군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에도 전쟁의 여신이 많다. 대표적인 여신이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투구를 쓴 엔뇨(Enyo), 벨로나(Bellona), 미네르바(Minerva) 등이다. 현실 속에서도 용감하게 전쟁을 이끌던 여인은 많이 있었다. 메리 부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무너진 성벽
무너진 성벽 넘어로 마을이 보인다

시민전쟁 중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와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유럽으로 도망쳐 망명길에 오르고, 찰스 1세는 붙잡혀 처형(1649년 1월 30일)됐다. 왕도 없애버렸겠다, 기세가 등등해진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를 등에 업고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크롬웰은 그렇게 권력의 맛에 빠지더니 급기야 의회마저 해산시켜 버리고 노골적으로 독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청교도 신자였다. 그래서 청교도적인 정책을 강요했는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성탄절 예배 참석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금지했다.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한 음식물 구매를 금지하고 발각되면 모두 압수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삶을 생각하며 조용히 보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일요일에는 스포츠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채찍으로 때렸다. 욕설을 한 번 하면 벌금형, 계속하면 징역형에 처했다. 여자가 화장하는 것도 금지했다. 순찰 중인 군인에게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화장을 지워야 했다. 화려한 옷도 금지됐다. 여자는 목에서 발끝까지 덮는 검은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둘러야 했고 남자도 검은색 옷을 입고 머리는 항상 짧게 유지해야 했다. 극장과 여관업도 금지 됐다. 일요일에 일을 하는 것은 물론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도 금지했다. 그런데 정작 올리버 크롬웰 자신과 가족만큼은 이 모든 규칙에서 예외였 다. 더 나쁜 짓도 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을 잠재적 적으로 생각해 끊임없이 괴롭히고 죽인 것이다. 그러던 문제의 인물,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말라리아와 신장결석으로 사망했다. 왕보다 더한 독재의 쓴맛을 본 영국인들은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찰스 2세에게 돌아와 달라며 러브콜을 보냈다. 찰스 2세가 망명 생활 9년 만에 돌아와 왕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이 군주제로 복귀한 것이다. 찰스 2세는 올리버 크롬웰의 시신을 묘지에서 꺼내 부관참시하고 머리는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내걸었다.

(다음 글 '폐허의 미학'으로 이어짐)

코프캐슬 성의 내부
폐허로 남은 성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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