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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국 왕실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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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만면에 행복 가득한 미소를 띤다. 그리고 유유히 손을 흔든다. 마차가 가는 길은 왕자와 왕비를 축복하러 나온 백성들로 가득하고, 하늘에서는 축복의 꽃가루가 하염없이 흩날린다. 세상에 모든 남녀가 꿈꾸는 로망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동화 속의 한 장면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현실이고, 생활이다. 바로 이 주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Her Majesty The Queen, Buckingham Palace, London, SW1A 1AA

버킹검 궁전
버킹검 궁전의 가격은 약 3조 3천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4월, 세기의 결혼식이 있었다. 왕위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이었다. 8천5백 명의 저널리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달려왔고, 180개국 20억 명의 인구가 이들의 결혼식을 지켜봤다. 길거리 파티도 영국 전역 5천 곳에서 열렸다. 결혼식 전날 밤부터 버킹엄 궁전과 국회의사당 일대는 텐트와 침낭을 들고 나와 밤샘하는 시민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영국 전역은 물론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세계에서 몰려온 시민들이었다. 비행기값이며, 체류비며 만만치 않은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버킹엄 궁전 앞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왕실 결혼식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긴 21세기에 왕실이 존재한다는 게 더 큰 아이러니이긴 하다. 그것도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영국에서 말이다. 한 커플을 만났다. 결혼식에 대한 의견을 묻자 상당히 흥분했다.

궁전 정문
버킹검 궁전은 번지수가 없다

“왕실 가족에게 욕을 해주고 싶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쓰며 결혼식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권력을 쥐고 태어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뽑은 사람들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죠? 재산도 자그마치 7조 원이라니. 공평하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은 매일 생활고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잃고 있어요. 공공예산 삭감해 가며 우리한테는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자기들은 인생을 즐기고 있잖아요.” 커플은 기차역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국가 공휴일로 선포된 이 날 왕실의 결혼식 따위엔 관심이 없다며 여행을 떠나버린 영국인의 숫자는 350만 명에 달했다 (여행사 연합회 ABTA 발표). 리처드 버넌이라는 시민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왕은 범죄에도 기소되지 않아요. 조사하는 게 불법이죠. 영국에서는 여왕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아주 낮은 계급입니다.” 군주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무관심한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리퍼블릭(공화주의)이라는 단체가 가장 선봉에서 군주제 반대를 이끌고 있는데 회원이 대략 1만 6천 명 정도다. 어떤 힘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다. 그래서 아직 왕실이 존재하는 다른 7개 유럽국가의 군주제 반대단체와 연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페인,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중에 영국 왕실이 돈도 가장 많고, 힘도 제일 세다.

왕실은 휼륭한 관광상품이다

군주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국가 기강이나 국민단결에 도움이 된다, 연예인들처럼 국민을 즐겁게 한다” 같은 의견도 있고 “국가 이미지 제고나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있다. 이중 관광객 유치를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식만 보더라도 60만 명의 해외 관광 객이 찾아와 1조 8천억 원의 경기 부양 효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했고 향후 4년간 4백만 명이 더 영국을 찾을 것으로 기대를 했다. 그런데 계산기를 잘 두드려 보면 꼭 남는 장사만도 아닌 것 같다. 영국이 왕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한 해에 7백억 원이다.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한 사람당 1,200원씩 부담을 하는 셈이다. 그 유명한 보스턴 컨설팅은 영국에 군주제가 없어지면 약 1조 원에 상당하는 생산성 향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전망한 바도 있다. 경제적인 부분만 따지면 없어지는 게 마땅하다는 이야기다. 2008년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경제가 워낙 안 좋다 보니 윌리엄과 케이트도 국민 정서를 많이 의식했다. 그래서 나름 조촐하게 치르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결혼식 비용으로 360억 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일반 영국인의 평균 결혼식 비용은 3천6백만 원이다. 경찰 5천 명 동원에 나랏돈 130억 원이 들어갔고 행사 후에 행사장 주변을 청소하는데도 7억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써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다니엘 핌롯(Daniel Pimlott)이라는 파이낸셜 타임스 경제부 기자는 결혼식을 공휴일로 지정해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액이 정부 쪽 추산 5조 3천5백억 원, 영국 산업연맹 추산 10조 7천억 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마차
영국을 방문하는 전세계 정상들은 버킹검 궁전의 초대를 영광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영국 왕실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다’라고 알고 있다. 영국 사람들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만도 않은 게, 국회에서 결정된 정책의 대부분은 최종단계에서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정책 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정치권에서 합의한 내용에 대해 여왕이 최종 사인을 해줘야 효력이 발휘된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언론사인 공영방송 BBC도 10년마다 국왕으로부터 칙허장(Charter), 즉 운영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국 국왕은 공식적으로 국가의 원수이고 국군 통수권자일 뿐 아니라 총리를 임명할 권한, 의회를 해산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총리나 내각의 보고를 받으며 국가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결정권까지 행사한다. 물론 실제로는 총리가 대부분의 권한을 행사하지만 총리의 권한이라는 것이 엄밀히 말하면 국왕이 총리에게 위임한, 다시 말해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그래서 총리가 “저에게 위임하지 마시고 국왕, 당신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세요” 할 수도 있다. 아무도 그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지 않지만 법은 왕의 권한을 그렇게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외교에 있어서도 영국의 국왕이나 왕족이 해외 방문을 나가면 해당 국가는 극진히 모시며 국빈대접을 한다. 어떤 나라의 최고 수반이 영국을 방문할 때 버킹엄 궁전의 초대를 받으면 가문의, 아니 국가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왕실이 미디어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당하다. 여왕이나 왕실에서 한마디 하면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정치권이 귀를 기울인다. 왕실의 권위가 곧 국가의 권위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왕족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

영국 왕실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영국 왕실은 엄밀히 말해 종교의 자유가 없다. 1534년,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부터 독립해 영국형 가톨릭, 즉 성공회(=프로테스탄트)를 만든 이후로 가톨릭은 영국 왕실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1701년 의회는 모든 왕족은 가톨릭 신자와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왕권이 다른 종교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가톨릭뿐 아니고 성공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금지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전근대적인 왕실의 종교 법은 2013년에 이르러 “왕족도 가톨릭 신자와 결혼할 수 있다”로 살짝 완화됐다. 하지만 뒷부분이 중요하다. “가톨릭 신자는 왕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배우자가 다른 종교인 것까지는 허용이 되지만 왕이 다른 종교를 가지는 것만큼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법으로 인해 왕의 자리에서 멀어진 왕족이 적지 않다. 프린스 에드워드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면서 왕위서열에서 제외됐다. 그 밖에도 니콜라스 윈저, 알버트 윈저, 에드워든 윈저, 루이 윈저 등이 모두 왕위서열에서 제외됐다. 한때 왕위 계승 서열 8위였던 프린스 마이클(Prince Michael of Kent)은 가톨릭 신자와 결혼을 한 후 서열에서 빠졌다가 2013년 왕위 계승법이 바뀌면서 서열에 복귀했다. 하지만 궁전의 식구가 늘면서 지금은 계승 서열 51번째로 왕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찰스 3세의 둘째 아들 해리 왕자는 미국 여인 메건 마클과 결혼한 후 왕실과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을 떠났지만 여전히 왕위 서열 5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메건은 결혼 직전 개신교에서 성공회 신자로 개종했다. 해리의 앞줄에는 해리의 형 윌리엄과 윌리엄의 자녀 3명이 있다.

결혼식
왕위 서열 1위 해리왕자의 결혼식-Google 이미지

영국에 왕실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건 사실 모든 이들에게 미스터리다. 로빈 아처라는 런던대학교 LSE 정치사회학과 교수는 그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요즘 연예인 스타일, 즉 스타 중심의 문화가 중요해졌는데 신통하게도 왕실은 그걸 알고 그걸로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에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죠. 영국 군주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다국적, 제국적 군주제입니다.” 여기서 교수가 ‘다국적, 제국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호주나 캐나다 같은 옛날 영연방 국가들이 아직도 영국의 여왕을 자기들의 여왕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가 지적했듯이 영국 왕실은 대중에게 수많은 가십거리와 뉴스, 스캔들을 제공하면서 스스로 스타화, 연예인화되고 있다. 21세기 최고의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해리와 매간의 결혼과 이후의 행보에 대한 대한 관심도 연예인에 대한 관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의 국민은 버킹엄 궁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는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보기 때문이다. 왕실의 성은 아직 견고하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신’의 가치를 생각해 스스로 그 성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 성을 더 견고하게 다지려 노력한다. 군대에 가고, 총을 들고 전쟁에 참전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도 성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보면 맞을 것이다.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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