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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폐허의 미학(Cult of R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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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 '5대 600으로 맞짱뜬 여자'에서 이어짐)

영국에서는 허물어진 성, 허물어진 사원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전쟁으로 허물어진 곳도 있지만 시민전쟁 이후 왕정을 무너트리고 정권을 잡은 의회, 오늘날로 따지면 국회가 철거 명령을 내리거나 주인이 떠나면서 혹은 쫓겨나면서 방치돼 자연스럽게 허물어진 경우가 더 많다. 의회가 철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성이 더는 저항의 본거지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코프캐슬 역시 심하게 허물어진 성이다. 의회군의 손에 넘어갔을 때 파괴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이 너무 튼튼했다. 의회군이 화약까지 동원했지만, 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주민들이 성벽의 일부를 떼어다가 집을 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도 코프캐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코프캐슬의 마지막 성주, 메리 뱅크스 부인의 투혼이 너무 진하게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구된 후 곧바로 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듬해, 1661년 4월 11일 하늘나라로 떠났다.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긴 것이다. 메리 부인의 후손들은 코프캐슬뿐 아니라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을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자선단체,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했다. 이쯤 되면 코프캐슬을 잘 지켜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코프캐슬
코프캐슬에 서면 탁 트인 들판을 품에 안을 수 있다

찰스 2세는 자기편에서 싸우던 성주들에게 성만 되찾아준 것이 아니었다. 의회군의 명령으로 파괴된 성에 대해 보상금도 지급했다. 그러나 성주들은 보상금을 성을 복구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장소에 더 크 고 화려하며 살기 좋은 주택을 짓는 데 사용했다. 메리 뱅크스 부인의 예에서 보듯이 그때 무너진 성의 대부분은 방치돼 오늘에 이르고 개인에게 팔리거나 내셔널 트러스트 혹은 잉글리시 허리티지 같은 문화재 보호 단체로 넘어가게 됐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성의 역할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는 것이다. 14세기 이후에 지어진 성은 군사적 방어보다 통치기관이나 거주지로써의 역할에 집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됐다.

코프캐슬처럼 허물어진 성과 윈저캐슬처럼 멀쩡한 성을 보는 느낌은 매우 다르다. 어떤 이는 ‘폐허’가 주는 감동이 훨씬 크다고 한다. 이유는 폐허 속에 훨씬 밀도 높은 시간과 기억 혹은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폐허를 보는 내 나름의 느낌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도 같다. ‘폐허’를 ‘사연’이나 ‘역사적 사건’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다. 파손의 정도가 큰 장소일수록 더 드라마틱한 역사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난히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러는 ‘폐허의 미학(Cult of Ruin)’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코프캐슬은 폐허의 미학이 물씬 묻어나는 곳이다. 너무 멀쩡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고,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지고 끊어진 성벽은 부러진 뼈마디 같고 지붕도 출입구도 사라진 용도 불상의 공간은 주름 같기도 흉터 같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늙었으되 기품이 살아있는 여인의 뒷모습 같고 가까이서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던 솔로몬의 표정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영국의 문화재, 특히 무너진 성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구심이 하나 있다. 왜 어떤 장소는 복원을 하고 어떤 장소는 복원하지 않는 것일까? 왜 코프캐슬 같은 곳은 폐허로 놔두면서 리즈캐슬이나 윈저캐슬, 햄프턴 코트 같은 곳들은 수시로 수리하고 복구를 하는 걸까.

리즈 캐슬
리즈 캐슬 Leeds Castle은 1119년에 돌로 지어진 성으로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보존되고있다
캐슬 내부

이런 궁금증과 관련해 사이먼 젠킨스 (Simon Jenkins)라는 방송인 겸 칼럼니스트가 <더 가 디언>에 쓴 몇 개의 칼럼을 읽었다. 그는 도널드 캠벨 (Donald Campbell)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도널드 캠벨은 자동차나 보트를 타고 속도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가였다. 1967년 1월 4일 그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 지방에 있는 호수, 코니스톤 워터 (Coniston Water)에 블루버드 K7이라는 보트를 띄우고 도전에 나섰다. 1차 도전에서 478.9km의 속도를 기록했다. 그리고 곧이어 2차 시도에 나섰다. 그런데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물 위를 질주하던 보트가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두어 바퀴를 돌고는 그대로 물 위로 곤두박질쳤다. 더 큰 문제는 영국 해군 잠수팀이 투입 돼 2주간 수색을 벌였지만, 캠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블루버드는 호수 바닥에서 찾았지만, 캠벨의 가족은 블루버드가 캠벨과 함께 있어야 한다며 인양을 거부했다. 그 후 블루버드의 위치는 비밀에 부쳐졌고 실종된 캠벨과 함께 호수 바닥에 잠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호수 끝에서 캠벨의 시신이 발견됐다. 2001년 5월, 34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것이 캠벨의 시신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사람의 뼈가 발견돼 DNA 검사를 해본 결과 캠벨로 밝혀진 것이었다. 불행히도 머리는 끝내 찾지 못했지만, 그는 블루버드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캠벨의 딸 지나(Gina)는 아빠와 함께 최후를 맞은 보트를 복원해 박물관에 전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복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문화재 복권 기금(Heritage Lottery Fund)에 비용을 신청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거부됐다.

블루버드 K7
블루버드 K7은 478.9 키로미터의 속도를 달성한 후 조종사 도널드 캠벨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구부리고 다듬고 새 부품을 넣으면 그건 새로운 보트지 블루버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이먼 젠킨스는 이 지점에서 지나를 지지했다. 그는 “지나는 젊은이들에게 빛나고 밝은 공학의 미래, 속도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데 문화제 복권 기금은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사이먼 젠킨스는 복원된 것이라고 해서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사르트르의 조각상이 복제품인데도 불구하고, 헨리 8세가 살았던 햄프턴 코트를 지탱하고 있는 벽돌과 들보가 새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감탄한다면서 난파된 블루버드보다 복제된 블루버드가 더 많은 정보와 본질을 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재에 대해서도 지붕이 없는 성은 성이 아니라 그냥 폐허로, 학자나 사진작가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라면서 복원을 주저한다면 앞으로 영국에는 문화재가 아니라 고대 폐건축물만 남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반면 소설과 시를 쓴 문학가이자 디자이너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자연주의 패턴의 창시자 윌리엄 모리스는 복원을 ‘속임수이자 해킹’이라고 잘라 말했다. 빅토리아시대 최고의 예술 평론가로 평가받는 존 러스킨도 복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면서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며 복원된 건축물은 가짜다. 복원보다는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물관 내 블루버드 K7
34년만에 구조된 블루버드 K7의 잔해. 더 러스킨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런 논란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이야기는 복원하는 것과 복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달라요”인 것이다. 나는 이 기준 없는 정책에 찬성한다. 젠키스와 러스킨의 상반된 주장 중에 어느 한쪽만 진리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회자정리’라는 말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변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자체를 감상하는 것이 상실감을 줄이려 붙들고 늘어지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자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건이든 장소든 복원 혹은 복제품이라고 하면 감동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나로서는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적의 장소이든 안전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최소한의 복구 혹은 개조까지도 해야겠지.  지나는 문화재 복권 기금의 도움 없이 고집스럽게 블루버드를 복원해 블루버드 K7의 잔해와 함께 코니스톤 워터에 있는 러스킨 박물관(The Ruskin Museum)에 기증했다. (다음 글 '바다를 품은 땅'으로 이어짐)

블루버드 K7 사고장면 

블루버드 K7 사고장면

복원된 블루버드 K7 

복원된 블루버드 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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