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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바다를 품은 땅, 룰워스 코브와 쥬라기 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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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 '폐허의 미학'에서 이어짐)

코프캐슬에서 해안선을 따라 25분쯤 서쪽으로 달리면 룰워스 코브(Lulworth Cove)다. 깊이에 따라 물 색깔이 다르게 보일 정도로 청정한 바닷물, 모양이나 색깔은 제각각이지만 파도에 쓸리고 저희끼리 부딪쳐 하나같이 동글동글 하고 반질반질해진 돌멩이를 볼 수 있는 그런 바닷가다. 신이 떨어뜨린 조가비에 맑은 물이 고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만(灣)인데 바다로 통하는 입구가 없다면 작은 호수로 보일 수도 있다.

자갈
물속까지 형형색색의 자갈밭이 펼처져있다

룰워스 코브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 위에 올라서면 하늘과 바람과 시원하게 펼쳐진 북대서양을 마주할 수 있다. 발이나 몸을 담그기에는 태양 볕 뜨거운 여름이 제일이겠지만 손을 담가보는 정도로 충분한 나는 가급적 번잡한 계절을 피한다. 가을이나 겨울, 그때는 손님 없는 카페에서 인적 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초가집

해변에 닿기 전에 룰워스 마을을 통과하는데 돌로 쌓은 두꺼운 벽에 버섯처럼 두툼한 초가지붕을 올린 집들을 볼 수 있다. 런던은 셰익스피어 극장 같은 특정 장소를 제외하고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금지된 지붕이다. 그런 지붕을 대치드 지붕(Thatched Roof)이라 하고 그런 집을 대치하우스(Thatch House)라고 한다. 밀짚이나 갈대를 주로 이용하는데 수명은 40~50년이지만 8~10년 주기로 갈아준다. 나이가 많은 대치 하우스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입구가 작다. 벽은 울퉁불퉁한 바윗덩어리의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창문은 펼친 손바닥보다 조금 크다. 실내 곳곳에 굵은 나무 기둥과 대들보가 뒤꿈치를 들면 머리가 닿을 것처럼 낮은 천장을 받치고 있다. 조명은 대체로 어두워서 동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옆에 앉으면 따뜻하고 아늑하다. 그런 펍에서 에일과 함께 피시앤칩스를 먹으면 ‘너무나 영국적인 풍경’이 완성된다.

룰워스코브는 풍광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임이 분명하지만,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장소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곳에 가면 학교에서 배운 지구과학이 자동으로 소환된다. 룰워스코브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 그리고 그 일대의 해안절벽과 기암괴석이 지층과 지각변동의 결과를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스와니지에서 룰워스코브를 지나는 154km의 해안을 쥐라기 코스트(Jurassic Coast)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해안가에 갑각류, 곤충, 연체동물, 어류, 양서류 그리고 파충류와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수억만 년 전부터 생성된 화석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각종 동식물이 가득 새겨진 돌덩이, 즉 화석숲(Fossil Forest)도 볼 수 있다. 그곳은 1억 8천5백만 년의 시간을 새기고 있는 곳이다. 영국이 사막이었던 트라이아스기를 지나 열대 바다였던 쥐라기와 늪으로 덮여있던 백악기를 거쳐왔다는 증거로 말이다. 쥐라기 코스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지만 출입이나 화석 채취에 제한이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해서 화석을 채취할 수 있다.

지층
19세기 초부터 지질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고 1830년대에는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다
해변
방문객들은 화석발굴, 지질학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쥐라기 코스트는 바닷가다. 그래서 해양 화석을 발견하는 것이 덜 신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소개할 장소가 또 있다. 영국 중부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는 버밍엄이다. 내륙 한가운데 있어서 북극에 빙하가 모두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더라도 물에 잠길 가능성이 없는 도시다. 그런데 그곳에서 멸종된 해양동물인 삼엽충 화석이 발견됐다. 버밍엄 외곽에 더들리(Dudley)라는 지역에서 처음 발견돼 ‘더들리 버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식학명은 칼리메네 블루멘바치 (Calymene blumenbachii). 4억 2천8백만 년 전, 실루리아기에 살았던 해양동물이다. 더들리 버그는 이후 영국 전역에서 발견이 됐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 중부엔 철생산에 사용할 석회암을 채굴하는 광산이 많았다.

지층
화석으로 뒤덮인 렌즈네스트 야산
화석

그때 광산에서 나온 화석은 삼엽충뿐이 아니었다. 산호와 달팽이, 불가사리도 나왔다. 당시 광부들은 발견한 화석을 화석 가게나 수집가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바다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진 육지 한가운데서도 멸종된 해양동물, 그것도 열대 해양동물의 화석을 발견하는 것쯤은 ‘별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들리에는 렌스 네스트(Wren’s Nest)라고 하는 나지막한 돌산이 있다. 한때 광산이었던 곳이다. 그 산은 자체로 화석덩어리다. 광산 주변뿐 아니라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해 속살을 드러낸 돌과 바위에서 해양 동식물의 흔적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파도가 스치던 물결 흔적도 절벽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렌스네스트 역시 보호지역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중의 접근과 화석 채취는 막지 않는다. 그래도 망치나 삽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다. 

쥬라직 코스트나 렌스네스트에 화석이 널려 있다고는 하지만 간직 하고 싶을 만큼 형태가 뚜렷하고 적당한 크기의 화석을 찾기는 쉽지 않다. 토끼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실컷 찾다가 포기하고 기념품 가게나 박물관에서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 워낙 흔하다 보니 비싸지도 않다. 물론 상태나 크기, 희소성에 따라 꽤 고가의 화석도 있다. 어떤 고생물학자는 나에게 선배 학자에게서 받은 것이라며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삼엽충 화석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을 행운의 상징으로 생각해 항상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그의 선배도 선배 학자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고 하니 행운이 학자에서 학자로 이어지고 있던 셈이다. 4억 년 전 정글 같은 바다에서 탄생해 먹고 먹히는 사슬 속에 살다가 사라진 삼엽충 한 마리가 자신의 시신을 덮고 덮고 또 덮었던 흙과 돌과 나무와 바람에 단단한 흔적을 새기고 4억 년 후 화석이 되어 그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땅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간이라는 종의 주머니에서 행운의 돌로 태어났다는 것. 이게 신화가 아니면 무엇을 신화라고 할까. 고생물학자들은 영국이 쥐라기에도 바다였다고 주장한다. 이크티오사우르스(Ichthyosaurs)나 플레시오사우르스(Plesiosaurs) 같은 바다공룡들이 사냥해 먹던 암모나이트와 벨모나이트 화석이 영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암모나이트와 벨모나이트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오징어의 선조쯤 된다. 이쯤 되면 영국 땅은 영국이 한때 바다였다는 것을 그것도 열대 바다였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더들도어
왼쪽 아치 형태가 더들도어 Durdle door다. 천 년 전에 지어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뮤직비디오와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다

지구과학은 단위가 몇백 혹은 몇천만 년이다. 그에 비하면 역사서의 몇백, 몇천 년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시간을 지구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2300년 전에 사망한 알렉산더 대왕은 나와 동시대를 살다 간 사람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홀로세’라고 부른다. 물론 인간이 붙인 이름이다. 백만 년 후에도 여전히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학자들은 10억 년 후에는 지구에서 생명체가 사라질 것이고 75억 년 후에는 태양에 녹아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오백 년도 못 가 없어지고 말 것 같은데 2천 년 전에도 말세라고 했다는 걸 보면, 그 숱한 종말론이 매번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또 모르겠다. 백만 년 후에 내 뼈 한 조각도 삼엽충처럼 박제가 되어 누군가의 주머니 속을 돌아다니고 있을지. 희망 사항이다. 죽어서라도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행운이 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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