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두 번째 스코틀랜드행이었다. 이번엔 피로를 무릅쓰고 장거리 운전을 택했다. 런던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오는 동안 아침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밤이 되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도시는 어둠이 밀어 넣은 고요함에 빠져 잠들어 있었지만 다리는 몇 개의 조명과 함께 깨어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중세시대 돌다리였다. 영국에서는 다소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돌다리. 그런데도 굳이 그날 밤 그 다리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 다리가 다름 아닌 스털링 브리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투표소로 갈 것이었다. 그리고 영연방으로 함께했던 300년 동거를 끝내고 독립국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한 시대와 작별을 앞둔 마지막 순간, 그 밤에 스털링 브리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옛날 독립 스코틀랜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1297년 9월 11일, 그날도 스털링 평원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이 밀어 넣은 고요함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편에 선 스코틀랜드 영주들의 연합군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흐르는 긴장 속 ‘고요함’이었다. 그들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포스 강(River Forth)을 어떻게 건널지 여러 날 고민했다. 포스 강에는 다리가 딱 하나 있었다. 다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데다가 한 번에 겨우 두 명 정도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강폭은 약 70m. 2천 명의 기마병과 7천 명의 보병이 건너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연합군이 1만 3천 명에 달했다고도 하고 5만 명에 달했다고도 하는데 5만 명은 과장된 것으로 본다. 아무튼 연합군은 그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바로 스털링 브리지였다. 무거운 공기가 평원을 채웠다. 그 무게에 풀 소리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진군 명령을 기다렸다.
에드워드 1세의 꿈, 합병
여기서 잠시 스털링 집결 이전의 시간으로 가보자. 당시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1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그를 ‘스코틀랜드를 때리는 망치’라는 뜻의 해머 오브 더 스콧 (Hammer of the Scots)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알렉산더 3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1286년 3월 19일, 술에 취해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해 버렸다. 알렉산더 3세는 가족사가 기구했다. 그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를 모두 앞세운 외톨이었다. 스코틀랜드에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이 찾아왔다. 아니다. 알렉산더에게는 한 명의 혈육이 남아 있었다. 노르웨이 왕과 결혼한 큰딸이 출산 중 사망하면서 낳은 손녀 마가렛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름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데 알렉산더 3세보다 먼저 사망한 아내의 이름은 마가렛이었다. 그런데 그의 첫째 딸 이름도 마가렛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딸, 그러니까 알렉산더 3세의 손주 이름도 마가렛이었다. 알렉산더 3세의 둘째 아들 이름은 알렉산더였다. 작명문화에서 기인한 것인데 사족이 길어질 테니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알렉산더 3세가 살아생전 손녀 마가렛을 왕으로 지명해 놓았었기 때문에 그녀가 왕이 될 자격은 충분했다. 문제는 그녀의 나이가 겨우 3살이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의 권력 공백을 반겼다. 잘 이용하면 평소 군침을 삼키고 있던 스코틀랜드를 한입에 삼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아들과 마가렛을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만들 계략을 꾸몄다.
그런데 마가렛이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는 도중에 사망해 버렸다. 그녀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정략결혼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이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에드 워드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중재를 받아들이면서 조건을 제시했다. 자신을 스코틀랜드를 아우르는 왕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영주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성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존 발리올(John Balliol)이 조건을 수락하고 스코틀랜드의 왕이 됐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존 발리올이 자신들의 뜻을 잘 헤아려 왕 노릇을 하고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가 자신들, 즉 스코틀랜드를 괴롭히지 않고 알아서 살게만 내버려 둬 준다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속셈은 달랐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됐으니 스코틀랜드는 이제 잉글랜드의 속국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명색이 왕인 존 발리올을 일개 부하처럼 취급하고 수시로 불러 욕보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전쟁을 할 것이니 병사를 보내라고 요 구했다. 참다못한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이 1295년 7월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영주들은 허수아비 왕 존 발리올을 탄핵해 버리고 대신 12개 평의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는 한편 프랑스와 비밀조약을 체결해 프랑스 편에 설 것에 합의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에드워드가 격노했음은 물론이다. 1296년,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존 발리올을 생포해 런던탑(Tower of London)에 가둬버렸다. 이때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왕의 상징인 스콘석(The Stone of Scone)도 약탈해 가서는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직접 통치할 국왕임을 선포했다. 자신이 통치하는 잉글랜드에 스코틀랜드를 강제로 합병시킨 것이다.
스털링은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와 경제 중심지 글래스고 위쪽, 그러니까 하이랜드로 올라가는 관문이었다.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지어진 스털링 성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을 만큼 오래된 성인데 그 성에서 알렉산더 3세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많은 왕이 태어나 죽고, 정치하고, 왕좌에 올랐다가 사라졌다. 독립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잉글랜드 군과 스코틀랜드 군이 번갈아 가며 뺏고 빼앗기는 공방을 벌였던 곳이다. 스털링을 차지하면 스코틀랜드를 차지하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 정치적으로도 군사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다. 스털링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스털링이라는 이름의 어원도 전투, 투쟁, 투쟁의 장소라는 뜻의 게일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삼면이 가파른 절벽인 스털링 성에 올라 보면 도시 전경과 그 옛날 전투가 벌어졌던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벌판 끝에 언덕이 있다. 아니, 우뚝 솟은 탑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전설이자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윌리엄 월리스의 기념탑이다.
윌리엄 월리스, 모험의 시작
윌리엄 월리스의 근본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다.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할 뿐이다. 그는 1297년 5월에 있었던 한 사건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기록은 꼼꼼하지 않아서 전후 배경이 빠져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라나크 (Lanark)라는 도시의 치안대장 윌리엄 드 헤설릭(William de Heselrig)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출생과 사건의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그는 1272년에 엘더슬리(Elderslie)에서 상류층에 준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던디(Dundee의) 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비에 휘말려 잉글랜드 고위층의 자제와 병사 둘을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됐다. 도피 생활을 하 던 중 몰래 라나크에서 어린 딸을 기르며 사는 아내 마리온 브라이풋(Marion Braidfoot)을 방문했는데 그만 잉글랜드 병사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월리스는 용케 그들을 따돌리고 도망쳤다. 그러자 화가 난 라나크의 치안 책임자 헤설릭이 월리스의 아내를 대신 잡아다가 강간을 하고 잔인하게 죽였다. 그날 밤 분노한 월리스가 30명의 동지를 이끌고 라나크 성을 기습해 잉글랜드 병사들과 헤설릭을 모두 죽였다. 윌리엄 월리스의 모험은 여기서 출발한다.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의 왕 존 발리올을 잡아가고 직접 통치를 선언하자 스코틀랜드 전역에서는 무장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윌 리엄 월리스는 에트릭 숲(Ettrick Forest)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잉글랜 드군을 괴롭혔다. 그의 활약이 스코틀랜드인 사이에 퍼지면서 월리스는 영웅이자 신비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월리스는 중서부를 휩쓸고 있었고 앤드류 모레이(Andrew Moray)는 북부 스코틀랜드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 두 전쟁영웅이 합류한 건 1297년 9월 던디에서였다. 던디를 수복한 월리스와 모레이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에드워드의 명을 받고 진군하는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스털링으로 향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스털링 브릿지다. 스털링 브리지에 집결한 월리스와 모레이의 병사는 약 5,300명으로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편에 선 스코틀랜드 연합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윌리스 쪽 병사가 2,30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에드워드의 명으로 연합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은 써리경 (John de Warenne, 6th Earl of Surrey)이었다. 그는 경험 많은 장수였다. 그래서 스털링 브리지를 건너 진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월리스와 모레이에게 협상단을 보내 순순히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월리스와 모레이는 단칼에 거절했다. 월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싸워서 스코틀랜드를 지키고 자유를 쟁취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진군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연합군이 조심스럽게 스털링 브리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월리스와 모레이는 기 다렸다. 연합군이 2천 명쯤 다리를 건너왔을 때 멀찍이서 지켜보던 월리스의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다리를 건넌 연합군은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맹렬한 공격을 받고 일대 혼란에 빠졌다. 써리경과 아직 다리를 건너지 못한 연합군 수천 명은 강 건너에서 월리스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자기편 병사들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했다. 그야말로 떼죽음이었다. 시인 블라인드 해리(Blind Harry)가 쓴 윌리엄 월리스 전기에 따르면 연합군 1만 명이 월리스 군의 칼에 죽고 7천 명이 물에 빠져 전멸했다고 한다.
물론 시인이 쓴 영웅담이니만큼 영화 못지않은 허구성이 가미됐음을 감안하고 볼 일이다. 기마병 100명과 보병 5천 명이 전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연합군은 반 이상이 강을 건너지 않은 상태로 멀쩡하게 남아 있었지만, 떼죽음을 지켜보면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결정했다. 잉글랜드의 완벽한 패배였다. 기록은 없지만 월리스 쪽 사상자는 경미했을 것으로 본다. 제일 큰 손실은 앤드루 머레이가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앤드루 머레이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많은 지역을 다스리던 기품 있는 엘리트 영주였다. 그는 일찍이 잉글랜드에 반기를 들고 싸워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군인으로서도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존재만으로도 월리스에게는 큰 힘이자 방패였다. 어떤 영주들은 월리스를 근본 없는 자로 생각했고 시기도 했지만 머레이가 옆에 있어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영향이 크겠지만 스털링 브리지 전투의 승리를 윌리엄 월리스만의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앤드루 머레이의 작품이기도 했다. 작전 자체가 앤드루 머레이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앤드루 머레이는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자는 그가 부상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털링 브리지 전투는 잉글랜드와 가장 크게 맞붙은 싸움이었고 스코틀랜드가 맛본 가장 큰 승리였다. 월리스는 작위를 받고 왕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가디언(Guardian of Scotland)에 추대됐다. 가디언은 왕이 공석일 때 일시적으로 국가를 지키고 통치하는 자리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직무대행쯤 되겠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는 스털링 브리지에서의 참패를 인정할 수 없었다.
게릴라와 정규전의 대결
그는 다음 해인 1298년 직접 1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진했다. 그리고 7월 22일 윌리엄 월리스와 팔커크(Falkirk)에서 맞붙었다. 월리스는 약 6천 명의 병사로 에드워드의 군대를 상대했다. 소규모 게릴라전에 익숙했던 월리스에게 앤드루 머레이의 빈자리는 컸다. 월리스는 4천 명의 병사를 잃었고 에드워드는 2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수적으로나 전술 적으로나 월리스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 에드워드를 이길 수 없었다. 월리스는 요행히 죽지 않고 탈출했다. 그리고 가디언의 자리를 내려놓고 7 년간 잠적했다. 학계는 월리스가 프랑스 등 유럽을 돌며 도움을 호소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월리스가 스코틀랜드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303년이었다. 그는 아난데일(Annandale)과 리드스데일(Liddesdale) 등 곳곳에서 잉글랜드 군과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1304년 2월 에드워드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마침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한 에드워드는 계속 저항하고 있는 윌리엄 월리스를 생포해 오라며 현상금을 내걸고 수배령을 내렸다. 18개월을 도망 다니던 월리스는 1305년 8월 3일 글래스고 근처에서 에드워드의 충실한 부역자 존 멘티스(John de Menteith)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런던으로 이송됐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적 존재가 된 윌리엄 월리스를 어떻게 처형하느냐는 스코틀랜드 정복에 어떻게 종지부를 찍느냐와 같았다. 에드워드 1세는 최대한 잔인한 방법을 선택했다. 8월 23일, 월리스를 런던탑(Tower of London)에서 끌어내 벌거벗기고 말에 묶은 다음 스미스필드 Smithfield까지 질질 끌고 가 목을 매달고 산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불태웠다. 그리고 사지를 절단해 뉴캐슬(Newcastle)과 버윅(Berwick), 퍼스(Perth) 그리고 스털링(Stirling)으로 보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각지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머리는 장대에 매달아 런던 브리지에 걸었다. 그야말로 공포정치의 끝판이었다.
스털링 브릿지는 전투 중 무너졌다는 설도 있고 연합군이 일부러 무너뜨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말이 정답이든 나무로 지어진 스털링 브리지는 1297년 9월 11일 무너졌다. 그날 내가 찾은 다리는 스털링 브리지를 재현한 것이었다. 위치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140m쯤 아래로 내려왔고 재료는 나무가 아니라 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다리가 생긴 게 1400에서 1500년 사이라고 하니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유지하면서 잉글랜드와 다툼을 이어가던 시기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초원 위에서 싸우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다리와 강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래서 역사는 그날의 전투를 ‘스털링 브리지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를 볼 때 과장과 허구가 포함되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특히 ‘브레이브 하트’는 그 뛰어난 만듦새와 평가 그리고 인기에도 불구하고 고증면에서 만큼은 문제가 많은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진짜 역사가 궁금하거든 다큐멘터리나 역사서를 보아야 하는 이유다. 스털링 브리지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글이 역사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윌리엄 월리스 이후의 이야기를 조금만 덧붙이자면 윌리엄 월리스가 처형을 당한 후, 끝난 것 같았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 북부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로버트 브루스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전쟁은 다시 한번 본격화된다. 로버트 브루스는 스털링 근처 배넉번에서 에드워드의 아들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을 2만 5 천명대 8천 명이라는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물리쳐 실질적인 독립을 확보한다.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승전보를 올리다가 에드워드 3세와 조약(Treaty of Edinburgh Northampton)을 맺으면서 독립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로버트 브루스는 로버트 1세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1296년에 시작된 1차 독립전쟁은 1328년에 이르러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물론,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된다. 로버트 브루스는 윌리엄 월리스 못지않은 스코틀랜드의 영웅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아웃로 킹(Outlaw King)’은 비교적 고증이 잘된 영화로 평가받는다.
윌리엄 월리스의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오르면 도시 스털링과 포스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칼을 높이 치켜든 월리스의 동상과 그가 사용하던 칼도 그곳에 가면 볼 수 있다. 그를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는 스털링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곳곳에 있다. 그리고 런던에도 있다. 세인트 바르톨로뮤스 병원(St. Bartholomew's Hospital) 벽에는 그가 처형된 장소라는 표시와 함께 라틴어로 “자유는 최고의 가치다. 아들들아, 절대로 노예처럼 살지 말아라”는 말이 쓰여있다. 윌리엄 월리스는 역사뿐 아니라 영화와 문학과 음악을 장식하며 전방위적인 유명세를 누리는 인물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인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해 믿을 만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학자들 말처럼 다소 과장된 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고단했던 스코틀랜드에게 최고의 용기와 위안과 희망을 선사해 준 인물인 것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영웅은 필요하다. 한 사람쯤 가슴속에 영웅을 품고 사는 사람은 조금은 더 당당하고 조금은 더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라고 해서 모두가 알아주는 인물일 필요는 없다. 영웅은 공유의 대상이 아니다. 각자 자기만의 영웅을 비밀처럼 가지고 있다면 그게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웅이 되어 주는 세상,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와 희망이 되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 같다.
그날 밤, 2014년 9월 17일. 스털링 브릿지 아래엔 운명의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다리 너머 언덕 위에서는 윌리엄 월리스가 스털링을 향해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프리덤”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날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투표소로 향했다. 그러나 800년 전 윌리엄 월리스가 외치던 그 자유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는 영연방 잔류를 선택했다. 윌리엄 월리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털링 브리지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요하지 않소. 우린 그저 과거일 뿐이니”라고 했을까? 스털링 성 아래, 한 투표소 앞에서 만난 시민 중 한 사람이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윌리엄 월리스는 그냥 역사 속 위인일 뿐이에요. 그는 그의 시간을 살았고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살뿐이죠. 그때와 지금이 같을 수는 없어요.”
'영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페로 아일랜드-1부 (0) | 2023.01.23 |
---|---|
런던 안에 런던, 더 씨티 (0) | 2023.01.20 |
천년의 전설, 네스호 (3) | 2023.01.19 |
마법사의 귀환-웨일즈 앵글씨 (2) | 2023.01.19 |
사라진 마법사-웨일즈 앵글씨 (0) | 2023.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