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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안에 런던, 더 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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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도시 '더 씨티'

더 씨티 전경
21세기 마천루가 솟아오르고 있는 더 씨티

미국의 월 스트리트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을 이끌고 있는 더 씨티 The City는 런던 한복판에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더 씨티’가 뉴욕의 월가나 서울의 여의도처럼 런던의 한 지역이라고 알고 있다. 오해다. ‘더 씨티’는 정식 명칭이 ‘씨티 오브 런던 City of London’이다. 딱 여의도 크기인 87만 7천 평인데 런던 속에 있지만 엄연히 독립된 도시다. 독립된 시장, 독립된 경찰, 독립된 세금 시스템, 독립된 국기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국 국회의 의결사항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공식적으로는 여왕도 ‘씨티 오브 런던’ 시장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이제부터 편의상 ‘더 씨티 The City’라고 하겠다. 더 씨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용이 들고 있는 영국 국기가 자주 눈에 띈다. 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 국기다.

시티 오브 런던

 

보통 영국 하면 떠올리는 깃발은 유니언잭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국기를 합쳐서 디자인한 것이다. 더 씨티의 국기는 유니언잭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 왼쪽 상단에 붉은색 검을 넣어 구별한다. 검은 로마가 사도 바울 Saint Paul을 참수할 때 사용했던 칼을 상징한다.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사도 바울은 더 씨티가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로 여기는 인물이다. 걷다가 붉은 검이 그려진 깃발을 든 용이 보이면 더 씨티의 영역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수호천사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자면 런던의 수호천사는 토마스 베켓이다. 헨리 2세 치하에서 대주교를 지냈는데 교회 권력을 장악하려는 왕에게 반항하다가 살해당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그를 순교자로 선언했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그리고 개인까지도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수호천사 문화는 로마시대 때 시작됐다. 당시에는 순교자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순교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예배를 보면 순교자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 즉, 순교자가 나와 하나님을 연결시켜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구원하고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 도시와 국가 그리고 가족과 개인까지도 말이다. 오늘날 수호천사는 자신의 이름이나 생일과 관련된 성자를 찾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름이 앤드류 Andrew인 사람은 이름이 같은 성 앤드류 Saint Andrew를 자신의 수호천사로 삼을 수 있다. 실제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던 성 앤드류는 스코틀랜드가 수호천사로 삼은 인물이다. 1320년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함께 정식으로 수호천사가 되었는데 그 훨씬 전부터 윌리엄 월리스나 로버트 브루스 같은 전쟁 영웅들은 전투를 치를 때마다 성 앤드류에게 기도를 올려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런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런던의 원래 이름은 런더니움

‘런던’이라는 이름은 런더니움 Londinium에서 유래됐다. 서기 43년,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명으로 4만 명의 로마 병사가 영국을 침략했을 때, 로마군은 지금의 ‘씨티 오브 런던’에 본부를 세우고 영국 정복의 교두보로 삼았다. 그때 교두보가 된 지역을 로마는 ‘런더니움’이라고 불렀다. 로마 군대는 서기 190년에서 225년 사이에 런더니움을 두르는 장벽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상업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정세가 내분과 내전, 외부(게르만족)의 도발로 불안정해지자 모든 걸 고스란히 남겨 두고 철수해 버렸다. 서기 410년이었다. 로마가 철수하기 전까지 영국에는 잉글랜드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때까지 영국은 브리타니아 또는 브리튼이라고 불렀다. 잠시 그때로 가보자. 로마는 본국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약 400년간 브리튼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지만 스코틀랜드만큼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는 픽트족이 살고 있었다. 픽트족 (Pict)은 툭하면 브리튼으로 내려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는 굉장히 호전적인 민족이었는데 머리도 좋아서 전쟁에 관한 한 로마군을 능가하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픽트는 그림을 뜻하는 라틴어 삥제레 Pingere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들처럼 얼굴이나 몸에 그림과 문신을 새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픽트족에 막힌 로마는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고 한반도의 38선처럼 브리튼 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헤이드리안 방벽 (약 118km)을 세웠다.

헤이드리안 방벽
로마군은 스코틀랜드 픽트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허로운 들판에 기나긴 장벽을 건설했다.

픽트족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실상 로마제국의 북방한계선이었다. 오늘날 헤이드리안 방벽은 역사 덕후들이나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410년, 로마가 떠나자 픽트족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켈트족을 공격하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아일랜드가 침략을 일삼았다. 켈트 족은 바다 건너 지금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에 살고 있던 앵글족 Angles과 색슨족 Saxons 그리고 주테족 Jutes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 매우 용맹스러운 민족이었다. 켈트족의 요청을 받은 대륙의 세 민족은 한걸음에 브리튼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켈트족과 힘을 합쳐 픽트족을 몰아내는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안 그래도 로마가 브리튼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부터 호시탐탐 해안가로 침입해 브리튼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던 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도 없겠다, 켈트족이 불러주겠다,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브리튼에서 총독 역할을 하던 마그너스 맥시머스 Magnus Maximus는 로마로 철수하기 전 보티게른 Vortigern에게 브리튼을 맡기면서 훗날을 기약했었다. 보티게른은 마그너스 맥시머스의 사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보티게른은 똘똘하지 못하게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북방의 피트족을 막아보자는 속셈이었겠지만 색슨족을 수하로 기용한 것이다. 472년 (463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앵글로 색슨은 회의장에서 몸속에 숨기고 있던 칼을 꺼내 브리튼 귀족들을 죽였다. 그것도 비겁하게 등 뒤에서. 힘없는 보티게른은 앵글로 색슨과 협정 Treaty of Hengist and Horsa with Vortigern을 맺고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앵글로 색슨의 푸들이 되어야 했다. 앵글로 색슨은 브리튼을 빠르게 장악하고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땅을 나누어 먹었다.

고대 영국 지도

 

그리고 그 땅에 각자의 왕국을 세웠다. 총 7개였다. 노섬브리아 Northumbria, 머시아 Mercia, 동앵글리아 East Anglia는 앵글족이, 웨색스 Wessex, 서색스 Sussex 그리고 에색스 Essex는 색슨족이, 켄트 Kent는 주트족이 지배했다. 켈트족은 서쪽 구석, 웨일즈로 밀려났다.

무주공산, 영국 땅 따먹기

로마가 떠난 후 브리튼은 서부개척시대의 금과 같았다. 멀쩡히 켈트 족이 살고 있는 땅이었지만 그들을 만만하게 본 유럽의 수많은 종족들이 골드러시를 연상케 할 만큼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종족이 앞서 언급한 세 종족이었는데 그들은 서로 빠르게 동화됐다. 그중 대표적인 종족인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오늘날 영국의 민족을 대표하는 종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은 7개 왕국 중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앵글로족의 이름을 따 앵글라 랜드 Engla Land라고 불리다가 10세기에 왕국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잉글랜드 England라고 불리게 됐다. 영국에서 잉글리쉬 English라는 언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5세기 앵글족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영국에서는 라틴어와 켈트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앵글족이 사용한 언어는 그들의 고향 독일에서 온 언어였다. 오늘날 올드 잉글리쉬 Old English라고 부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대 영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였다. 이 말은 현대 영국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5세기를 여행할 수 있다고 해도 앵글로색슨 조상님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현대 영어는 앵글로색슨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노르망디 지방의 프랑스어와 올드 잉글리쉬가 섞이면서 발전하고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 단어를 보면 프랑스어와 똑같거나 닮은꼴이 많다. 참고로 노르만족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프랑스로 내려와 프랑스 문화와 동화되면서 생긴 민족이다.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노르만족이라고 하는데 유럽대륙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살았다. 7개 왕국은 건설 초기, 각자의 왕에게 절대 충성을 하면서 켈트족과의 전쟁에 힘을 합쳤지만 켈트족이 웨일즈로 밀려나고 완전히 힘을 잃자 길고 복잡한 패권전쟁에 돌입했다. 그야말로 영국판 춘추전국이었다. 그런 혼란을 틈타 793년, 동쪽 해안으로 바이킹이 침공했다. 그리고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연합군을 형성해 바이킹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927년 웨섹스의 왕 애틀스탄 Æthelstan이 바이킹의 마지막 보루였던 요크 York를 함락하면서 브리튼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통일 잉글랜드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애틀스탄은 고대 영어 이름인데 ‘고귀한 돌 Noble Stone’이라는 뜻이다.

격변에도 흔들리지 않은 런더니움

로마가 떠난 뒤 장벽 안의 도시, 런더니움은 서서히 런던이라고 불렸고, 자체적인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외부세계와 거래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일곱 왕국의 시대를 거쳐 통일 잉글랜드까지 장벽 밖의 거칠고 어지러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런더니움은 번성했다. 그러다가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이 700척의 배와 1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건너와 영국을 침략했다. 그리고 10월 14일 영국 남부의 해안도시 헤이스팅스에서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 Harold II와 맞붙었다. 해럴드 2세는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눈에 맞았다는 이야기가 야사처럼 전해질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것은 앵글로색슨 왕조의 종말이자 노르만 왕조의 시작을 의미했다. 윌리엄의 군대는 기세가 등등했다. 파죽지세로 잉글랜드 전국의 도시들을 접수하고 겁에 질려 모두가 도망친 런던 장벽 앞까지 무혈입성했다.

로마가 쌓은 장벽
로마가 쌓은 장벽

하지만 로마가 건설한, 런던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은 너무 견고했다. 높이가 최고 6m, 두께가 3m의 돌로 쌓은 성인 데다가 성 주변은 깊게 파인 도랑이었고 공격이 용이하도록 높게 솟은 탑이 곳곳에 세워진 요새였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자신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해 주면 성 안의 자치권과 재산을 모두 보장해 주겠다며 협상을 시도했다. 런던은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 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로마가 건설한 런더니움은 런던이라는 이름을 거쳐 ‘씨티 오브 런던’으로, 장벽 밖의 지역은 그냥 런던으로 불리게 됐다. 런던이 '씨티 오브 런던'을 품고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런던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런던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금융산업의 절대강자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씨티 오브 런던’이 런던을 통째로 삼키기 전에 런던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주장을 심각하 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장벽 안의 면적이 40만 평이었는데 현제 '씨티 오브 런던'의 크기가 88만 평이니까 영토가 2배쯤 확장되기는 했다.

더 씨티 야경
장벽은 무너졌지만 더 씨티는 더 크고 화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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