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 아일랜드는 연중 내내 흐리고, 바람도 많고, 춥다. 아니 선선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2022년 기준으로 가장 더울 때가 14도, 가장 추울 때가 0도 (체감온도는 -8도)였다. 그리고 일 년에 302일 비가 왔다. 거의 매일 한 번은 비가 내린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해가 가장 짧았던 날은 12월로 5시간, 해가 가장 길었던 날은 6월로 20시간이었다.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겨울엔 1~2시간, 여름엔 5~6시간 정도였다. 혹자는 그 비 오고 추운 데를 뭐 하러 가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햇살 좋고 모래알 반짝이는 남태평양으로 가는 게 낫지 낳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잊지 마시라. 페로 아일랜드는 522명의 여행전문가가 선정한 지상최대의 낙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춥고 흐린 날씨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그 섬엔 있다. 그리고 페로 아일랜드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오히려 관광거리다. 그곳의 하늘과 바다, 초원은 시시각각 다른 빛깔을 빚어낸다. 고개를 하나만 넘거나, 터널을 지나도 다른 세상, 다른 날씨, 다른 빛깔의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간만, 아니 30분만 머물러도 현란하게 움직이는 바람과 구름이 빚어 놓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 풍경은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을 화사하게 비추는 햇살일 수도 있고, 몽환적인 기분에 빠져들게 해주는 안개일 수도 있고, 바다위로 은가루처럼 흩뿌려진 햇살일 수도 있다. 계곡 사이로 수줍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를 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페로 아일랜드의 구름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빠르게 움직이며 하늘 위에 수백 가지 형상을 그려내고 지우고 또 그려내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5월 21일부터 7월 21일 사이에 페로 아일랜드는 백야다. 24시간을 기다려도 완벽한 어둠은 내리지 않는다. 잠을 자고 싶거든 두꺼운 커튼을 쳐야만 한다.
공항에서 내리면 수도 토우샤우 (Torshavn: 영어로는 토샤반이라고도, 토르스하운 이라고도 발음하는데 현지발음으로는 토우샤우에 가깝다)까지 한 시간이 좀 안 걸린다. 수도 토우샤우엔 페로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26%에 해당하는 13,957명이 산다. 2008년엔 대학교도 문을 열었다. 그전까지 페로 아일랜드엔 대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 중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이 있기는 하지만 학과가 다양하지 않아서 아직도 유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다. 페로 아일랜드 유일의 대학인 University of Faroe Island는 국립대학교다. 학생수는 제법 늘어서 약 1천 명. 인구에 비하면 적은 숫자는 아니다.
없는 게 많은 나라
페로 아일랜드엔 없는 게 많다. 없는 게 많아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페로 아일랜드다. 페로를 여행하려면 렌트를 하는 게 좋다. 그런데 운전을 하다 보면 신호등이 없다는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수도 토우샤우 같이 큰(?) 도심에만 겨우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속도 감시 카메라도 없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양들과 아무 때나 튀어나오는 토끼들이 과속을 방지해 준다.
도로는 왕복 2차선. 그보다 넓은 도로는 없다. 고층빌딩도 없다.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같은 글로벌 푸드체인도 없지만 음식도 커피도 맛나기만 하다. 자극적인 놀이 문화도 없다. 공해도, 소음도 없고, 군대도 범죄도 없다. 집도 차도 잠그지 않은 채 그냥 다닌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해인 1945년 이후 약 80년간 페로 아일랜드에서는 겨우 10건의 살인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로 아일랜드의 감옥은 수용 가능 인원이 14명인데 2020년 기준으로 11명이 수감돼 있다. 그중엔 재판 전 수감자가 포함돼 있으니 실제 범죄자는 몇 명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그만큼 페로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 그래도 경찰은 100명쯤 있다. 인구도 5만 명이 겨우 넘고 범죄도 없는 나라에서 100명의 경찰들은 뭘 할까 궁금했다. 농반진반 범죄도 없는데 할 일이 뭐가 있겠냐며 근무시간 때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페로 아일랜드에서 생선은 나누어 먹는 음식이다. 밭에서 난 푸성귀를 이웃끼리 사고팔지 않는 우리네 시골 인심처럼 페로 사람들끼리는 잡아온 생선을 사고 팔지 않는다.고래고기도 마찬가지다. 고래를 잡으면 누가, 어디서 잡았든 모든 이웃이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 사실 페로 아일랜드는 고래잡이로 악명이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농사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고래는 조상 대대로 페로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귀한 존재였다. 한 마리만 잡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름은 밤을 밝혀주는 연료였고, 고기는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했으며, 풍부한 단백질은 추운 기후를 견뎌낼 수 있게 도와주는 귀한 영양소였다. 뼈도, 가죽도, 심줄도, 심지어 수염까지도 고래는 버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 문명과 함께 고래의 효용가치는 사라졌다. 수은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알려지면서 음식으로서의 가치도 사라지고 말이다. 이제 식당에서조차도 고래고기 요리는 맛볼 수 없다. 페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래를 잡으러 먼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포경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잡이에 관한 한 페로는 일본과 함께 요주의 대상 국가다. 씨 쉐퍼드(Sea Shepherd) 같은 과격한 고래보호단체의 공격을 수도 없이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마다 예닐곱 번씩 해안으로 몰려드는 들쇠고래(Pilot Whale) 잡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래사냥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고래가 나타나지 않는 해도 있다. 나타난다고 해도 횟수나 시기는 일정하지 않다. 최근 몇 년간은 출몰 횟수가 현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래사냥을 마치 해마다 벌이는 축제인냥 '고래사냥 축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전달이다. 고래사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해안에 들쇠고래가 출몰하면 연락망을 타고 온 동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그리고 고래 떼를 해변으로 몰아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숨통을 끊는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고래를 잡을 때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도구와 기술이 사용된다. 일정치 않지만 한 해 평균 800~900마리 정도가 잡히는데 온통 피로 물든 해변에 숨통이 끊어진 수백 마리의 고래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굉장히 자극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페로 사람들의 고래사냥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먹지도 않으면서 불필요하게 살생을 저지르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다. 하지만 페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고래잡이는 천년 이상을 이어온 전통이다. 게다가 먼바다로 포경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해변으로 몰려드는 고래를 몰아 잡는 것 뿐이다. 법적으로도 들쇠고래는 포경제한 대상이 아닐 뿐더러 개체 수가 문제가 되는 동물도 아니다. 그런데다가 상업적 목적의 포획도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먼 바다로 나가 포경도 하지도 않고 이전 세대처럼 고래고기를 자주 먹는 것도 아니지만 웬만한 가정은 모두 서너 덩어리쯤 고래고기를 가지고 있다. 해변으로 몰려든 고래를 잡으면 먹든 안 먹든 이웃끼리 똑같이 나누고 냉동상태로 보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말린 상태로 혹은 삶아서 먹는데 페로 사람이든지 비위가 아주 강한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천국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사는 페로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리고 정직하고 착하다. 여간해서 화도 잘 내지 않는다. 낯선 사람에 대해 경계의 눈빛을 보이지 않으며 간섭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먼저 말을 걸고 손길을 내민다. 국립자료보관소를 찾아 헤맬 때 짧지 않은 길을 함께 걸으며 목적지까지 직접 안내해 주고, 관계자까지 불러 소개해주던 노인을 잊을 수 없다. 낯선 곳에서 렌터카가 고장이 났을 때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일행을 대신해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해주고 온갖 조치를 취해주던 아버지와 아들을 잊을 수 없다. 한 해변 마을을 어슬렁거릴 때 골목 어귀에서 만난 따뜻한 커피와 차를 잊을 수 없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와 차 서프라이즈. 무료예요".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 입양을 했다며 아이들에게 꼭 한국을 보여주고 싶다던 호텔사장의 선한 눈빛도 잊을 수 없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 페로를 천국으로 만드는 건 바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압도적인 풍경과 자극적인 문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여행가, 역사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구열 불타는 여행가에게는 페로 아일랜드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뭐든 내려놓고 쉬고 싶다면, 그저 하염없이 게으르고 싶고, 하염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느끼고 싶다면 페로 아일랜드로 가시라.
※ 주의: 아래 영상은 시청자 연령제한이 있어 유튜브에서만 시청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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